1세기를 풍미한 세계 외교가의 거두, 미·중 및 중동 지역 데탕트(화해)를 이끌어 낸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미국 코네티컷의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미중 간 충돌과 중동 지역의 갈등이 재점화하고 있는 시점에서다.
키신저 전 장관이 설립한 국제 컨설팅 기관 키신저 어소시에이츠은 이날 성명을 내고 키신저 전 장관의 사망을 발표했다.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온 키신저 전 장관은 하버드 대학에서 문학사와 철학 석사·박사를 취득한 후 하버드 강단에서 국제 관계학을 가르치던 중 1960년대 중반부터 케네디 및 존슨 행정부의 외교 정책 자문으로 정계와 연을 맺기 시작했다.
1969년에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당시 발탁된 그는 1973년부터는 제56대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하면서 1977년까지 닉슨 및 포드 행정부에서 미국 외교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1969년에는 소련과 전략 핵무기 제한 협정 논의를 시작해 1972년에 전략무기제한협정 1차 조약(SALT 1)을 이끌어냈다.
또한 1972년에는 탁구를 이용한 '핑퐁 외교'를 통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며 1949년 중국 공산당 혁명으로 단절됐던 미·중 양국 간 수교 기반을 마련했고, 1973년에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 중재를 맡아 욤키푸르 전쟁 종전 합의를 이끌어냈다.
특히 1973년에는 베트남 전쟁 종료 합의 및 미군 철수 협상을 이끌어 낸 공로를 인정 받아 레둑토 북베트남 대표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1973년 중국 방문 직후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고, 1975년 유엔총회에서는 한반도 긴장완화 및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 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포드 전 미국 대통령이 '수퍼 국무장관'이라고 칭한 것에서도 그의 외교적 능력이 잘 드러난다.
다만 그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공산당 정권에 저항하는 독재 정권을 지원한 것을 두고 전범이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예민한 성격과 과도한 자신감 등도 반대 세력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키신저 전 장관은 국가 안보에 대해 총 21편의 저서를 저술해 1977년 국무장관 퇴임 이후에도 미국 외교가와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거두로 자리매김해왔다. 2001년 9.11 당시에는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키신저 전 장관에게 조사 위원회 위원장을 맡기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에서는 중국, 북한 문제와 관련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문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키신저 전 장관은 생전 중국을 100회 이상 방문하는 등 중국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올해 100세 기념 이코노미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류 미래가 미중 관계에 달려 있다고 할 만큼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올해 7월에는 중국을 깜짝 방문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는데, 당시 시 주석은 키신저 전 장관을 '옛 친구'라 부르며 환대했다.
한편 키신저 전 장관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