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취향 등을 전하며 취향 저격을 하고 있다. 무수한 밤을 견뎌내며 밤하늘의 별처럼 음악을 통해 위로를 전해주고 있는 그와 무수한 밤을 견뎌내고 있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Q. 앨범마다 주제 요소와 콘셉트가 뚜렷한 점이 인상적인데요. 이러한 콘셉트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구상하고 구체화하나요?
A. 그해의 음반은 그해의 제가 어떤 것에 심취해 있었는지에 따라 세분화되고 구성됩니다. 겉핥기에 불과한 수준이지만 천문학과 우주과학에 푹 빠져 있을 때 '월령'을 만들었고, 숲 산책과 식물 키우기, 나무 관찰에 심취해 있을 때 '소로'를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전문학에 대한 동경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 '환상소곡집' 시리즈를 만들었고 앞으로의 앨범 콘셉트도 아마 이러한 방식을 자연히 따라가게 될 듯해요. 잘 정립된 시스템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때 당시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을 틀로 삼아 노래들을 주조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Q. 창작을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뭔가요?
A. 가장 강력한 촉매제가 되는 것은 역시 팬 분들의 기다림이었다고 생각해요. 저의 가까이나 혹은 저기 어딘가에, '노래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절실한 감각을 자주 느끼는 편입니다. 팬 분들이 보내주시는 편지나 메시지 등을 읽다 보면 마음이 찡하거나 눈물이 날 때가 많은데, 그럴 때 마치 답장을 쓰듯, 곧바로 곡 쓰기에 돌입하게 되기도 해요.
노래가 필요로 쓰일 수 있으려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노래를 찾는 이에게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담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해요. 다친 이에게는 치료가 필요하고 지친 이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절망한 이에게는 붙잡을 희망이 필요하고 망설이는 이에게는 응원이 필요한 것처럼요.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 괜찮은 노래들을 담은 음반을 내놓았다고 생각하다가도,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아, 이런 이야기도 해주고 싶어, 해주었어야만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생겨나는 거예요.
진심으로 생각하고 아끼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도 모른 척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저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팬 분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팬 분들이 저를 그렇게 바라보아 주듯이 저도 마땅히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죠.
만약 제 노래를 아름다운 필요로 써주고, 또 계속해서 이어지는 새로운 필요로 갈급해주시는 팬 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흔들림 없이 창작 활동을 이어 올 수는 없었을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의지받고 있다는 감각은 실제로 제가 가진 능력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해내게 해요.
이런 이유로 저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매년 새 음반을 발매했죠. 원동력이라고 부를 만한, 실제적으로 제가 새로운 곡을 계속 쓰게 만드는 힘은 바로 그런 약속에 대한 감각입니다. 실제로 10여년째 이와 같은 생활을 쉼 없이 해오다 보니, 이제는 그런 작업을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고 힘들 것 같은 상태가 됐어요. 물론 작업이 쉽지 않고 매 앨범마다 드러나지 않는 크고 작은 고비들이 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여러 도움을 얻어 헤쳐나가고 있어요.
Q. 어떤 감정, 어떤 상태, 어느 곳에 누구와 있을 때 가장 평온하다고 느끼세요?
A. 저는 사람을 강아지처럼 좋아하지만, 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은 별로 즐기지 않아요. 아무리 멋진 곳이라고 해도 사람들로 북적한 곳에서는 쉽게 긴장 상태가 돼버려서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저의 타고난 예민함을 스스로 지탄했지만, 이제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많은 실패를 겪으며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저는 제 오래된 연인과 보내는 무료한 시간, 자연 속에 머무는 순간에 가장 나답고 평온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따분함, 비 내리는 날과 멍하니 공상하는 새벽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때로는 식물과 자연 현상과 책 속에서 삶이 체현되는 것을 실감하곤 합니다. 그러한 평온은 쉽게 얻을 수 있고, 멀리 찾아나서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서 더욱 실제적이고 효과적이지요.
Q. 규선 님께서 사랑하는 존재들이 궁금해요.
A. 저는 전방위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해요. 창문을 활짝 열어두지 않으면 어떤 새로움도 깃들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현 시대가 아티스트들에게 표현하기를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인지하기 위해 시사나 전 세계 공통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는 편입니다. 학생 시절 이후부터는 가사가 있는 음악은 그다지 듣지 않고 있어요. 음악을 들을 때는 주로 드뷔시나 클래식을 들어요.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듣게 되면 머리가 복잡해져서 괴로워지는데 그래서인지 음악보다는 책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에요.
저의 영감은 주로 자연현상이나 텍스트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나 자신과 주변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데 노력을 쏟고, 그 과정에서 왈칵 쏟아져 나오거나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들을 재료로 곡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도 아주 좋아하고 과학 잡지도 구독하고 있고, 관심이 생기면 이런저런 다양한 분야의 책들도 열심히 봐요. 최근에는 벤 윌슨의 '메트로폴리스'와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밑줄 치며 읽고 있어요. 전형적인 '음악가적인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인 모든 것들이 저를 통로로 하여 새로운 노래들로 쓰고 불러요.
Q. 규선 님의 삶에 채워가고 싶은 단어들이 있나요?
A. 저는 늘 깨닫고 싶어요. 삶에 대한 학구열이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누구에게 배우는 대신 스스로 깨닫고 싶고, 그렇게 알게 된 것들에 대해 나누고 싶어요. 죽기 전에 삶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어요. 직접 경험해서 알아가고 싶고, 사변적인 메아리들을 선명한 목소리로 바꾸고 싶습니다. 저는 앎을 갈구하는 것 같아요. 오직 아는 것만을 노래하거나 쓸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삶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 이상으로 더 채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Q. 음악의 소재가 안 떠오르거나 열심히 작업한 내 노래가 사랑받지 못할 때는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오래하기 위한 규선 님만의 방법이 있나요?
A. 마음은 언제나 흔들려요. 심지어 소재가 풍부하거나 충만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에도 저는 자주 그런 상태예요. 흔들림을 두려워하거나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아직도 매일 되새기고 있답니다. 왜냐면 창작력이란 그러한 두려움과 불안함을 내포한 상태에서만이 지속될 수 있는 무엇이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지 않고, 괴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어야지만 프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일을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돈을 벌고 생활도 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단순 취미나 '좋아하는 일' 정도의 각오에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겠죠.
Q. 규선 님의 가사를 들어보면 이별의 아픔을 경험했던 이야기들이 많은데요. 그런 아픔들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나요?
A. 각 노래들에 담긴 경험들은 모두 다르고, 모두 저의 개인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일일이 드러낼 필요는 없어 보여요. 음악가가 하는 일은 단지 어떠한 경험을 한 뒤에 어떤 식으로 그 일을 해석하는지를 노래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해석에 동의하거나, 공감하게 된 사람들이 그 노래를 사랑해주시는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어떤 아픔은 서서히 잊히고, 어떤 종류의 아픔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기도 합니다. 나아지고 싶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아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인 것 같아요.
Q. 규선님의 음악을 들은 사람이 느꼈으면 하는 감정이나 마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저기 누군가가 있다.' 저는 제 노래를 듣는 분이 그런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지금 깜깜하고 앞뒤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저기 나와 같은 누군가가 있다. 나처럼 괴로워하고 있고, 나처럼 싸우고 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누군가가 있다. 내 어둠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저기 어딘가에 아주 많이 있다고.
Q. 요즘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뭔가요?
A. 단연 기후문제입니다. 기후변화, 기후위기, 기후재난, 기후비상사태로 이어지고 있는 현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해요. 현재 저의 위치에서 제가 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음악인의 길을 가고자 하는, 특히 규선 님이 롤모델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A.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에만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장르나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남의 것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지 말고, 진실한 마음의 소리를 내는 데 모든 힘을 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인 척 할 필요가 없어요. 당장 부족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가면 설사 원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원숙해지게 됩니다.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반드시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나타날 거예요. 그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완성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래는 부르는 이가 아니라 듣는 이들로 하여금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노래가 향할 곳이 어딘지를 늘 마음속에 선명하게 그리세요. 그러면 더 많은 노래들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저도 그러한 변태를 늘 거듭하는 중에 있어요. 응원합니다.
Q.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창작자,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나요?
A. 최근에 어떤 책에서 '소리를 본다'는 표현을 보았어요. 그처럼 듣는 순간 '보여지는 노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쓴다면, 마치 음악처럼 '들리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해요.
Q. 마지막으로 무수한 밤을 견뎌낸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A. 누구도 같은 상황에서 당신만큼 잘해낼 수는 없었을 거라는 걸 기억해주세요. 자신이 가장 나약하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겨주어야 합니다. 낮 다음에 밤이 온다는 사실을 얼마만큼 확신하시나요?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그런 확신을, 다가올 아침에 대한 확신을 놓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견뎌주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