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오후 기업인과의 대화 행사가 끝난 뒤 기업인들과 영빈관에서부터 본관-불로문-소정원을 거쳐 녹지원까지 25분가량 경내 산책을 했다.
산책에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방준혁 넷마블 의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장 등이 함께 했다.
기업 맏형격인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문 대통령의 곁에서 기업인들을 이끄는 모습을 보이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유도했다. 이재용 부회장과 최태원 회장이 주로 문 대통령의 양쪽에서 나란히 걸으며 자리를 지켰다. 노영민 비서실장과 김수현 정책실장은 뒤쪽에서 조용히 뒤따르며 기업인들과 대화를 하는 모습이 주로 포착됐다.
이날 산책일정은 서울 시내 등 수도권의 미세먼지가 심각한 가운데 이뤄진 터라, 자연히 첫 이야기 주제는 ‘미세먼지’로 옮겨갔다.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은 “삼성과 LG는 미세먼지 연구소가 있다고 한다”고 말을 꺼냈다. 이 부회장은 “공부를 더 해서 말씀드리겠다”며 “에어컨과 공기청정기 등 때문에 연구소를 세웠는데 미세먼지 연구소는 LG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냐”고 구광모 회장을 치켜 세웠다. 그러자 구광모 회장은 “그렇습니다. 공기청정기를 연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고 맞장구를 쳤다.
서정진 회장이 문 대통령에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느냐”고 묻자 문 대통령은 “못하는 거다. 그냥 포기했다”고 답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 회장은 “대통령님 건강을 위해서라면 저희가 계속 약을 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약을 잘 안 먹습니다. 부작용 때문예요"라고 말하자 좌중에 웃음이 또 터져나왔다. 서 회장은 "수면제도 부작용이 있습니다. 호르몬을 조절하는 거라 먹기 시작하면 계속 먹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수면제는 졸릴 때까지 일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화제를 돌려 반도체 라이벌인 이 부회장과 최 회장에게 반도체 경기 전망 등을 물었다.
문 대통령은 이 부회장을 향해 “요즘 반도체 경기가 안 좋다는데 어떠냐”고 물었다. 이 부회장은 곧바로 “좋지는 않습니다만 이제 진짜 실력이 나오는 거죠”라고 답했다. 나란히 걷던 최 회장이 “삼성이 이런 소리하는 게 제일 무섭다”고 하자, 이 부회장은 평소 절친한 최 회장의 어깨를 툭 치며 “이런, 영업 비밀을 말해버렸네”라며 웃었다.
최 회장은 이어 “반도체 시장 자체가 안 좋은 게 아니라 가격이 내려가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면 됩니다. 반도체 수요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가격이 좋았던 시절이 이제 조정받는 것입니다”라고 시장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고 최 회장은 “집중과 선택의 문제”라며 “기업이 성장하려면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문 대통령에게 “지난번 인도 공장에 와주셨지만, 저희 공장이나 연구소에 한번 와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문 대통령은 “얼마든지 가겠다. 삼성이 대규모 투자를 해서 공장을 짓는다거나 연구소를 만든다면 언제든지 가죠”라고 화답했다.
서정진 회장도 “세계 바이오시장이 1,500조입니다. 이 가운데 한국이 10조 정도밖에 못합니다. 저희 삼성 등이 같이하면 몇 백 조는 가져올 수 있습니다. 외국 기업들은 한국을 바이오산업의 전진기지로 보고 있습니다”라고 국내 바이오기업에 관심을 부탁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우리 이공계 학생들 가운데 우수한 인재가 모두 의대, 약대로 몰려가는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는데, 이제는 바이오 의약산업 분야의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서 회장은 “헬스케어 산업이 가장 큰 산업입니다. 일본은 1년 예산의 30%를 이 분야에 씁니다. 외국 기업이 한국과 같이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일하는 스타일 때문입니다. 대통령께서 주 52시간 정책을 해도 우리 연구원들은 짐을 싸들고 집에 가서 일합니다. 그리고 양심고백을 안 하죠”라며 웃었다.
문 대통령은 산책에 동행한 현정은 회장에게 말을 건네며 대북사업에 관심을 나타냈다. 문 대통령은 “현대그룹이 요즘 희망 고문을 받고 있다. 뭔가 열릴 듯 열릴 듯하면서 열리지 않고 있다”며 “하지만 결국은 잘될 것”이라고 위로를 건넸다. 산책을 마치기 직전 현 회장에게 다시 다가가 “속도를 내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산책을 마친 후 기업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허리를 숙여 작별 인사를 한 뒤 집무실이 있는 여민관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