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4년 동안 동업 관계를 이어온 최씨 일가와 장씨 일가가 고려아연을 놓고 지분 경쟁을 벌이는 원인은 급격히 악화된 '재무 리스크'에 대한 견해차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추진한 대규모 투자가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 일가 시선에는 매우 위험한 행보로 비쳐졌다는 진단이다.
특히 올해 고려아연 차입금 규모가 사실상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갈등이 더욱 깊어지는 모습이다. 이에 양자가 당장 계열 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의 대규모 투자 전략을 수정하거나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지분율을 늘려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려아연은 영풍그룹 계열사다. 영풍그룹은 고 장병희, 고 최기호 창업주가 1949년 설립한 영풍기업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장씨 가문은 ㈜영풍을, 최씨 가문은 1974년 자매회사로 설립된 ㈜고려아연을 각각 경영하면서 재계에서 흔치 않은 '한 지붕 두 가족' 경영 체제를 유지해왔다.
다만 경영이 아니라 지배구조에 있어서는 두 가문이 회사를 함께 소유하는 형태를 취해왔다. 고려아연도 오랫동안 최씨 가문이 경영해왔지만 대주주는 장씨 일가가 맡아왔다. 대주주인 장씨 일가 지지 없이는 최씨 일가가 경영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구조다.
지난해 최 회장 취임 이후 이 같은 한 지붕 두 가족 구조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 최 회장은 신재생에너지, 이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자원 순환) 사업을 중심으로 한 '트로이카 드라이브'라는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에 1974년 설립된 이후 50년 동안 제련 사업 외길에 집중해왔던 회사의 체질 개선이 진행되고 있다.
이 같은 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대규모 투자가 단행됐다. 실제 최 회장 취임 전인 2021년 말 27개에 불과했던 고려아연 종속기업 수는 올해 6월 말 74개로 크게 늘었다. 이 기간 신재생에너지 기업 에퓨런, 리사이클링 분야 전자폐기물 업체 이그니오 등을 인수한 결과다.
대규모 투자로 재무 리스크가 크게 높아지면서 두 가문 간에 균열이 커지게 됐다. 지난 6월 말 기준 고려아연 차입금 규모는 총 1조575억원으로 2021년 말 4460억원 대비 2.3배 이상 늘었다. 이는 고려아연이 관련 정보를 공개한 1993년 이후 가장 큰 규모다. 1990년 이전 국내 금융권에서 1조원 이상 차입금을 조달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고려하면 사실상 역대 최대치다.
차입금 규모가 늘어나면서 회사 수익성도 압박을 받고 있다. 올해 상반기 고려아연 금융비용(이자)은 269억원으로 2021년 연간 기준치인 42억원을 6배 이상 뛰어넘었다.
문제는 글로벌 환경이 악화되면서 올해 고려아연 실적도 악화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올해 상반기 고려아연 영업이익은 3015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6659억원 대비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 같은 재무 리스크 악화는 사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올해 고려아연 내부에서도 갑작스럽게 늘어난 차입금이 부담스럽다거나 투자할 곳이 많아서 현금이 너무 줄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또한 장 고문도 대규모 투자 안건을 결정하는 고려아연 이사회에 두어 차례 참석하지 않는 등 간접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에 최 회장은 반대하는 장 고문 등에 맞서 대규모 투자 계획을 유지하기 위해 우호 세력을 포섭해 지배력을 강화했으며 장 고문도 이에 대응하면서 최근 지분 경쟁이 발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양측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양측이 당장 계열 분리 등 대규모 지배구조 변화를 추진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50년 제련업에 집중했던 고려아연의 미래 비전과 재무 리스크에 대한 견해가 달라 각자 지배력을 높여 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