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지린성 통화현(通化縣)에 도착했다. 이곳은 조선 압록강과 비교적 인접한 지역이다. 통화현의 미동(尾洞)에 있는 김기주(金紀周)의 집에 아들 성삼을 맡긴다. 김기주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김영주와 먼 핏줄 종형제(從兄弟)일 가능성이 있다.
한일합방 이후 안동 영양 일대에서는 만주 바람이 불었다. 1911년 일피(一避, 제1차 엑소더스)이후, 1912년 이피, 1913년 삼피행렬이 이어졌다. 이때 남자현 시댁과 친정의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대거 만주로 이동했다. 그녀가 낯선 만주행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이런 선발(先發) 인맥들이 이미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까닭도 컸다. 김기주가 남자현의 아들을 선뜻 맡아준 것은, 그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사진 - 석주 이상룡]
안동 출신으로 만주의 독립운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을 들 수 있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닌 그와 남자현은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활동을 통해 대면(對面)하고 함께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1919년을 기준으로 이상룡은 62세였고, 남자현은 47세로 열다섯 살 차이가 났지만 두 사람 모두 나이로 보면 노장에 속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의병항쟁을 할 무렵부터 석주와 교분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한 사람의 안동맨으로 남자현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은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을 꼽을 수 있다. 그녀가 서로군정서에 입단하게 되는 것은 일송이 연결해줬기때문이라는 기록도 있고 또 두 사람이 친인척 관계라는 주장도 있다. 남편 김영주와 김동삼이 모두 의성 김씨로 안동에 함께 거주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혈족(血族)일 가능성이 높다. 김동삼은 만주로 건너온 뒤 이름을 바꿨다. 원래는 김긍식(金肯植)이었다. 그는 1913년 중국의 동북삼성(東北三省) 혹은 동삼성을 뜻하는 의미인 ‘동삼’으로 개명한다.
[사진 = 일송 김동삼]
남자현보다 다섯 살 아래인 김동삼은 서간도 독립군 기지 개척의 선구자였다. 또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했던 사람이다. 1907년 3월 김동삼은 안동에 설립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의 교감이 된다. 여기에서 일하면서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한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이들 조직은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온다. 남자현이 만주에 갔을 무렵, 김동삼은 만주 독립운동 진영에서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었다. 이 낯선 곳에 온 그녀에게, 그는 물심양면의 지원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