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지 사흘만에 흥구동 비탈에서 당신을 만났소
목이 달아난 채 나뭇잎에 덮인 사람
비단폭 周-賢 두 글자가 아니었다면 당신인줄도 몰랐을 거요
당신에게 첫날밤 노란 색실로 이름 새겨
이것이 먼저 가는 순서인줄 알았다면
내가 지닌 賢-周를 드릴 것을
피묻은 그것과 내것을 맞추는 사이
피눈물 다시 배어듭니다
늘 따뜻하던 그 손이 차갑고
늘 차갑던 내 손이 지금은 따뜻하여
이제야 그 몸 데우는 날인데
우리 자현이 우리 자현이 그 따뜻한 음성
막 그렇게 불러줘야할 때인데
사랑해줄 그 눈길 그 입술은
어느 칼 끝에 꽂혀 사라졌는지
어느 굴헝에 처박혀 눈도 못감고 있는지
여보, 이것이 삶이오이까 이것이 죽음이오이까
한 뼘 땅도 지키지 못하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제 목도 찾지 못한 채 우는 이것은 어느 지옥이오이까
당신 유독 코가 커서 필경 콧대 높으리라 하니
대신 입이 낮지 않소 웃으며 대답하던 사람
코가 길어 길 永에 영주로구먼 했더니
아니야 코끼리라서 상주(象周, 김영주의 다른 이름)야
스스로 해명한 뒤 껄껄껄 웃던 그 사람
인도의 큰 강 건너는 향상(香象)되어 가시었소
돌아볼 땅이 없어 면목 없이 가시었소
첫사랑 접문(接吻,입맞춤)하던 그 신물 잃었으니
내가 그곳 따라가면 어느 입술로 나인줄 알까
을미의병 막바지
시골 곷볕(英陽)마을까지 분노가 흘러들어
친정아비 운보(雲甫, 남정한)는 일등제자인 당신을
창의(倡義)로 내밀었지요 그걸 거드는 내가 아니었다면
오로지 책벌레인 당신이 죽창 들고 나서진 않았으리
성난 마음을 깊이깊이 곰삭여
더 크게 싸우려고 호흡 가다듬었으리
그러니 당신을 죽인 건 나요
죽으러 떠난 길
돌담 어귀 끝까지 따라가서도 나는
웃으며 보냈소 돌아보는 당신에게
꺾은 모란 흔들었소
부질없는 눈물은 거두리라
이 곶볕만 해도 을미 과부 널렸으니
독특한 운명도 아니리다 국모도 제 궁(宮) 몸지키는
능욕의 강토에 살아있는 거나 죽어있는 거나
진배없는 길일진대 새삼 울어 무슨
청승을 떨 것인가 통정 문학 셋째딸로 태어나
꽃떨기도 서러운 궁지(窮地)의 과부로
담담히 지리라 당신과 후생을 도모하여
호미 걸어두고 그 칠월 찌는 날에
헤어진 자리서 다시 만나 깊이 사랑하리라
여보, 코끼리처럼 큰 기남자(奇男子)여
그때가 오면 날 모른 체 마오
그때가 오면 피묻은 비단조각 두 이름
다시 나눕시다
여보, 실은 할 말이 있소* 오늘밤
꿈이 되어 잠깐 보이기를
(* 곧 돌아오리라 믿었기에
그때 선물 주리라 생각하고 뱃 속에 뿌듯이 자란
우리 사랑 미처 말꺼내지 않았소
이제 영문도 모른 채 아비 없는 자식으로
운명이 바뀌어버린 유복(遺腹)에게
무어라 하리 목없는 아비와 아비없는 새끼에게
뭐라 말을 건네리오
여보 미안하오 당신이 꿈에 와서
아이 이름이나 지어주오)
빈섬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