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②]천재소녀 남자현의 어린 시절

2018-01-29 15:54
  • 글자크기 설정

둘째언니는 삼성가와 사돈 인연...의병 활동한 김영주와 19세때 결혼

[사진 = 신문에 공개된 남자현의 시댁 일가 사진. 사진 속의 인물들에 대한 상세내용은 알 수 없다.]



# 둘째언니의 손자는 삼성가 맏사위

남자현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1873년 12월 7일 태어났다. 부친은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를 지낸 남정한(南珽漢)과 이씨 부인(남자현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이에서 1남3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남자현에게는 오빠인 남극창(南極昌, 그의 아내는 안동 권씨)이 있었고, 언니가 둘 있었는데 첫째 언니는 재령 이씨인 이원발에게 시집을 갔고, 둘째 언니는 조지훈 집안으로 유명한 한양조씨 가문의 조학기와 결혼했다. 첫째 언니는 후손들이 서로 교류를 하지 않았고 집안 내력이 드러나지 않았다.

영양에서 이름난 부호(富豪) 가문에 시집간 둘째 언니는 조범석을 낳았는데 그는 일찍이 금융계에 몸담아 대구금융조합연회장을 맡았다. 조범석의 3남1녀 중 막내인 조운해는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원장을 지냈고 경북대 효석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이병철 전 삼성회장의 맏사위이기도 하다.

영양 남씨의 세보(世譜)에는 아버지 남정한의 생몰연대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역임했다는 통정대부는 어떤 관직인가. 조선시대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직급으로 요즘으로 치면 1급 관리관쯤 된다. 통정대부는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참여를 했고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봉조하(奉朝賀)가 되어서 녹봉을 받았다.

# 경북 영양의 교육자였던 부친 남정한

남정한의 증손자인 남재각(1924년생)은 “통정대부 칙지를 1972년 이전까지 집안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해 화재로 모두 잃었다”고 증언했다. ‘교지’가 ‘칙지’인 것은 고종이 왕에서 황제로 승격한 다음에 첩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따라서 광무황제 재임기인 1897년에서 1907년 사이에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통정대부는 관직의 직급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별다른 보직이 없으면 공명첩(空名帖)일 가능성도 있다. 조선 후기엔 이름 뿐인 첩지가 남발되기도 했는데, 돈을 주고 첩지를 사기도 했고 자식이 귀한 자리에 오르면 그 덕택에 받는 경우도 있었다. 또 나라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의미로 칠순이나 팔순 노인에게 공명첩을 일괄적으로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남정한이 현재로선 관직을 맡은 흔적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므로, 예우의 차원에서 직첩을 받았을 가능성이 큰데, 1896년 아들 김영주의 의병 전사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고종 황제가 통치권 과시 차원에서 지역의 원로들에게 내린 첩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남정한이 통정대부 직첩을 받았다는 점에 비중을 두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도 그가 영양 지역에서 교육자이자 정신적 리더로서 활동했던 점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남정한은 문하에 70여명의 제자를 두고 가르친 지역의 이름난 학자였다. 증손자 남재각은 어린 시절 집안에 가전하는 필사본 ‘근사록(近思錄)’을 보았다고 말했다. 주자학의 핵심 고전인 이 책의 분위기로 미루어 보면, 근본에 충실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실천하는 유학자의 그림이 그려진다. 이런 가풍 아래에서 총명한 소녀 남자현은 아버지이자 스승인 남정한에게서 학문의 핵심을 전수받았을 것이다.

# 8세 때 한자로 글을 지었던 영민한 소녀

그녀는 일곱 살 때 한글을 깨쳤고 여덟 살 때부터 한자를 배우면서 글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열두 살이 되면서 소학과 대학을 읽었고 열네 살에는 사서(四書)를 독파했고 한시를 지을 수 있었다.

남자현의 천재성은 270여년 전 같은 영양군의 인근 두들마을 석계종택에 시집온 장계향(1598-1680)을 떠올리게 한다. 장계향 또한 안동의 이름난 학자이자 부친인 장흥효의 수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녀의 학문은 남자 학생들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장계향은 열아홉살 때 아버지에게서 아끼는 제자 이시명의 계실(繼室)로 들어가라는 명을 받는다. 장흥효가 이어받은 퇴계의 학통을 전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이런 유학자 가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의 학문적 욕망을 모두 죽이고 평생 아들들을 대학자로 길러낸다. 남자현은 아버지에게서 이 훌륭한 선배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사진 = 경북 영양 남자현생가 마당 한켠에 놓인 장독대. 깨진 뚜껑이 스산하다.]



# 19세때 부친의 제자였던 김영주에게 출가

그녀는 열아홉 살에 안동 출신으로 부친의 제자였던 김영주(金永周)에게 출가한다. 그 또한 이시명처럼 명민한 제자였고 그의 가문은 뛰어난 유학자 집안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남자현의 시대는 장계향의 시대만큼 평온한 시절이 아니었다. 남정한은 제자들에게 사서삼경만 가르친 게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의기와 춘추대의적 의리관을 역설했다. 그의 제자들은 실제로 의병활동에 참가하여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분발했다. 의병들의 싸움터로 달려간 제자 중에는 남자현의 남편인 김영주도 있었다. 이상국 T&P​대표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