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8-01-29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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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 전북지구전투사령관 최석용 장군과의 인연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과 최석용(崔錫鏞) 장군과는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시절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런 관계로 전북도경에서 빨치산을 토벌할 전담부대로 제18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할 때, 전투경찰대대장에 차일혁을 강력히 추천했던 인물이 다름 아닌 최석용 장군이었다.

차일혁과 최석용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최석용이 1903년생이고, 차일혁이 1920년생이니 17살이나 차이가 났다. 고향도 남북으로 달랐다. 차일혁은 전북 김제이고, 최석용은 압록강 변에 위치한 평안북도 벽동이다. 최석용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남포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조선혁명당 산하의 조선혁명군에 가입하여 만주일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최석용은 조선혁명군에서 중대장을 거쳐 총사령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다.

그러다 1937년 최석용이 몸담고 있던 조선혁명군이 일본군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자 그는 항일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일본군에 투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에는 그는 중국의 공산군 토벌활동에 참가하다가 8·15광복이 되자 귀국하게 됐다. 그때가 42세로 적지 않은 나이었다.

그럼에도 최석용은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당시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제3기로 들어가 소위로 임관했다. 44세에 국군소위가 된 셈이다. 뒤늦은 군대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가 1947년 상황이다. 장교 임관 후 최석용은 과거의 군사경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진급했다. 여수주둔 제14연대 반란사건 때에는 소령 계급을 달고 제3연대 대대장으로 토벌작전에 참가했고, 1949년에는 백선엽 대령이 지휘하는 전남 광주 주둔의 제5사단 예하 제15연대(연대장 송요찬 대령) 부연대장으로 전남지역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때는 중령이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6·25전쟁이 발발이후 최석용은 대령 계급을 달고 남한지역 내 빨치산 토벌을 전담하는 국군 제11사단 예하의 제13연대장으로서 전북지역의 빨치산 토벌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때가 1950년 11월 상황이다. 그때부터 최석용은 전북지구전투사령관과 제13연대장 직책을 겸하면서 전북지역에 대한 빨치산 토벌작전을 책임지게 됐다.

그 당시 차일혁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대위 계급장을 달고 제7사단 구국의용대장을 거쳐 옹골연유격대장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군경과 함께 전북지역 수복작전에 참가하다가, 옹골연유격대장 당시 입은 총상으로 인해 결국 군에서 제대하게 됐다.

차일혁은 군에서 제대했지만 오랫동안 공산당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지역으로 가서 정치공작원으로 활동해 보고 싶었다. 차일혁은 백두산 아래로 거세게 흐르는 압록강가에서 사랑하는 조국과 겨레를 위해 ‘통일’이라는 뜻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차일혁은 그런 웅대한 구상을 가슴에 품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그때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게 된 시기였다. 그래서 북한지역으로 갈수가 없게 됐다. 국군과 유엔군의 후퇴와 함께 차일혁이 잠시나마 꿈꾸었던 ‘통일에 대한 열망’도 물거품이 됐다.

결국 차일혁은 북한에 가려던 뜻을 단념하고, 다시 전주에 돌아왔다. 그때 화랑사단(花郞師團)인 제11사단 제13연대가 남원과 전주로 들어오게 됐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쪽으로 가는 퇴로가 막혀 38선 이북으로 올라가지 못한 북한 정규군과 전북지역 내의 공산세력을 소탕하기 위해서다. 북한군들과 지역 공산세력이 전북 내에서 험준하기로 유명한 지리산을 비롯하여 회문산과 내장산 등으로 숨어들자, 전북도경에서는 군과 함께 빨치산을 전담할 전투경찰대가 필요했다.

그에 따라 전북도경에서는 전북일대에 준동하는 빨치산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제18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할 계획을 세우고, 대대장을 물색하던 중 전북지구전투사령관이던 최석용 대령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차일혁을 경감으로 임명하고, 전투경찰대대장을 맡기게 됐다.

차일혁도 대대장 취임을 요청받고 약간 망설였으나,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차일혁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며 각오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항일전선에서 한때 동지였던 전북지구전투사령관의 권유는 결정적이었다.

1950년 12월 10일, 차일혁은 전영진 인사계장의 안내로 김가전(金嘉全) 전북지사, 김의택(金義澤) 도경국장 겸 경비사령관 그리고 새로 전북지구전투사령관으로 부임해 온 최석용 대령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장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였다. 그 자리에서 최석용은 “차(車) 대장은 나와 함께 중국 항일전선을 누빈 동지가 아니오?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이런 비상시국에 건투를 빕니다.”라며 차일혁을 축하 겸 격려인사를 했다.

실제로 차일혁과 최석용은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같이 했던 동지였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전북일보 기자로 차일혁 부대를 오랫동안 취재했던 김만석(金萬錫) 기자는 자신의 비망록에서 두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 한 토막을 남겨두고 있다.

“전투사령관 최석용 대령과 두 사람이 향원이라는 술집에서 대담한 적이 있다. 차(車) 대장은 부하가 헌병대에 잡혀가 이를 부탁하려고 한 것 같았다. 최 대령은 차 대장을 전투경찰에 추천한 사람이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두 사람이 중국말로 대화를 해 알아들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기분 좋게 대담하더니 대담 중에 차 대장이 화가 났던지 최대령에게 거침없이 욕을 해댔다.”

김만석 기자는 비방록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최 대령은 차 대장과는 거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인데 선배대우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계엄사령관에게 그렇게 욕할 사람은 없었다. 전주경찰서장 박병배와 많은 경찰들이 옆방에 있었지만, 다들 두 사람의 싸움 소리에 놀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 차 대장은 그 이전에 김의택 도경국장이 회식자리에서 일본 노래 부르는 것에 화를 내고, 상을 발로 걷어 차 엎어버리고 방을 나가 주위를 경악한 적이 있어, 나는 또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지금 차 대장 앞에 있는 사람은 도경국장이 아니다. 계엄사령관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험악한 분위기는 자칫 잘못 했다가는 총 부림이 날지도 몰랐다. 그 이유는 항일투쟁을 하면서 최 대령이 일본군과 무언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일본군에 투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 대령은 말했다. “너라고 다른 것이 무엇 있느냐? 공작원이라는 것은 첩보원인 것을. 그 속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너도 중국에 간 것이 일본의 도움으로 간 것이 아니냐. 제일 먼저 김지강(金芝江) 선생하고 접선했고, 그리고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너의 말을 어찌 보증하겠는가. 과거사는 이야기하지 말자. 지금 현실이 중요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공박했지만, 둘 사이는 풀지 못할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차일혁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 제18전투경찰대대장 차일혁과 전북지구전투사령관 최석용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두 사람은 업무 때문에 관계를 맺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을 하기 위해 출정할 때는 반드시 최석용 전북지구전투사령관이 참석해서 격려사를 하고 장도(壯途)를 빌어줬다. 거기에 대해 차일혁의 반응은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두 사람의 생각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특히 차일혁이 고창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해 고창읍에 주둔하고 있을 때 최석용이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다. 차일혁은 사령관실로 달려갔다. 최석용은 찾아온 차일혁을 향해 “차(車) 대장, 경찰생활은 체질에 맞소? 나는 곧 국회의 인준을 거쳐 장성으로 진급하여 전방으로 갈 예정이오. 현역으로 복귀하여 나와 함께 전방으로 갈 생각은 없소? 그동안 차 대장이 거둔 전과를 고려하여 그에 상당한 예우를 해드리겠소.”

그 당시 차일혁은 여러 가지 주변상황을 보고 “내가 왜 경찰이 되었나?”하고 생각이 깊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최석용 사령관의 말에 대답을 않고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 그런 후 차일혁은 “사령관님은 군인생활이 체질에 맞아서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최석용은 “차 대장과 같은 사람이 내 옆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말을 꺼낸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 말끝에 차일혁은 “사령관님의 뜻은 감사합니다만 이제 와서 나 혼자 떠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제가 혼자서 떠나 버린다면 부하대원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대원들은 모두가 공비토벌이 끝날 때까지는 전투경찰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헤어졌고, 세월도 흘러갔다. 최석용은 자신의 예상대로 준장으로 진급하여 5군단 부군단장과 39사단장을 역임하고, 1959년 3월 육군준장으로 예편했다. 56세의 많은 나이였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대장은 혈기왕성한 39세의 장년(壯年)이었다. 최석용이 전역할 무렵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김동수, 박시창, 오광선, 박기성 등 장군들도 함께 군을 떠났다. 그때는 차일혁도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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