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독립투사 남자현④]시부모 억척봉양으로 효부상을 탄 '솔로'며느리

2018-01-3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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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잠을 하면서 의병지원 자금 모아…교회 통해 투쟁가들과 연결

# 남편 없이 홀로 자식 키우며 효도 며느리상을 받은 여인

남편은 가고 유복자(遺腹子)를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김성삼(金聖三)으로 불리고 김선달(善達), 영달(英達)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의 기록들은 저마다 달라, 20대와 30대의 남자현의 면모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 여러 가지 기록들을 찬찬히 간추려보면, 우선 진보군 진보면에서 효부상을 받았다는 내용은 저마다 빠뜨리지 않고 쓰고 있다. 앞으로 무장투쟁가로 활약할 여인이, 유교적 윤리에 충실한 ‘다소곳한 상’을 받았다는 점이 인상적이기도 하다.
 

[사진 = 남자현의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 부부. ]

 

 


어린 아들이 자라날 무렵 남자현은 시댁(석보면 답동에서 진보면으로 이사)에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것 같다. 길쌈을 하며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시댁에는 시부모가 모두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홀로 된 시어머니만 있었다고 하기도 한다. 남자현이 억척스럽게 일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집안에 남자가 없었다는 정황을 의미하지 않을까. 유복자 김성삼은 3대 독자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남자현의 시아버지도 외아들인 만큼, 그가 돌아가고 난 뒤 집안이 적막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진보면에서 효부상을 타게 되는 계기도, 의병활동을 했던 남편의 애국적 행적과 함께 집안의 힘겨운 사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그녀는 부드러운 성격과 치열한 자기 수행으로 적막한 집안에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을 것이다. 한편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효부상’은 시어머니의 장례를 곡진히 치른 며느리를 치하하는 상이었을 수도 있다. 관청에서 표창을 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며느리 남자현에게 유복자를 키우며 어렵사리 시어머니를 모신 그간의 수고를 치하하고 3년상을 충실히 치른 점을 격려하여 상을 주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효부상을 타게된 뒤 그녀가 다시 친정으로 옮겨가는 것도 납득이 간다. 시어머니가 작고한 뒤, 시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석보면 지경리에 있던 친정은 수비면 계동으로 이사를 한다.

# 시부모 모두 여읜 뒤 친정에서 양잠사업

남편 사후의 남자현이 영양에 머무르는 기간은 23년간이다. 이 23년은 유복자 아들이 24세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들이 장성해서 고향에 홀로 둬도 괜찮을 때까지 남자현은 묵묵히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녀가 시댁에서 친정으로 오는 때는 언제쯤이었을까. 그것을 정확하게 밝혀놓은 곳은 없다. 기록을 종합하면 아마도 한일병탄의 해인 1910년 무렵이 아닐까 한다. 친가로 온 뒤 그녀는 양잠을 하며 명주를 짜서 대구로 수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부녀자 교육과 어린이 교육에 투자를 했다. 친정에서 그녀는 적극적으로 사회적인 활동에 관심을 보이는 듯 하다.


[사진 = 대구에 진출한 일본 가타쿠라제사 실공장. 이 기업은 영남지역의 양잠농가를 수탈해 자본을 축적했다. ]


양잠에 대해서는 조금 언급할 만하다. 일제는 우리나라가 천혜의 잠업지(蠶業地)임을 파악하고 1919년부터 잠업기술을 보급하고 뽕나무 식재에 대한 보조도 하는 등 본격적인 양잠 육성책을 펼친다. 일제시대 때(1930년대 기준) 영양군의 잠업 종사자는 457명이었는데 여자 양잠업주가 115명, 여자 잠업조수가 308명으로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러니까 남자현은 양잠사업의 비전을 미리 본 셈이다. 그녀는 일찍이 투자를 하여 다른 지역으로 파는 유통 혁신을 통해 돈을 벌어들였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처음엔 교육사업에 썼지만, 갈수록 의병 지원사업에 더 많이 쓰게 된다. 그녀는 피신해온 의병을 숨겨주고 치료하는 일을 하거나 군인들의 무기를 보관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가 중요한 까닭은 남자현이 남편의 죽음 이후 마음 속에 깊이 숨겨놓았던 일제에 대한 분노를 조금씩 현실 속으로 꺼내기 시작했던 점과, 민족 의식과 사회 의식이 심화되는 기간이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투쟁활동의 네트워크로 활용하는 종교적인 입문 또한 이 기간에 이루어졌다. 영양군에 처음으로 교회가 들어서는 것은 1906년이다. 청기면 찰당골에 사는 전원구(田元九)라는 여인이 개신교를 믿기 시작해서 그녀의 시아버지와 시동생에게 전도를 했다. 당시 80여호 되는 마을에 30-50명의 신자가 모일 만큼 부흥했다고 한다. 곧 이어 일월면 오리교회, 수비면의 수비교회, 계동교회가 생겼다. 계동이면 바로 남자현 동네가 아닌가. 그녀는 신식문명인 예배당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 영양의 교회에서 만난 독립투쟁가들

중후기 의병으로 창의한 인사들은 ‘전문투쟁가’의 성격을 지녔는데, 교회의 집회를 통해 남자현은 안동과 영양 일대에서 활동하는 의병인사들의 인맥을 쌓게 된 것 같다. 이와 관련한 자료들이 보인다. 그녀는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최영호, 채찬(백광운), 이하진, 남성노, 서석진, 권모(某)와 연락하고 있었다. 당시 채찬이나 최영호는 이미 만주에 가 있었던 인물로, 국내 공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안동 출신 김동삼과의 연관성도 따져볼 만하다.

이들 상당수는 조선 내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대거 만주로 이동하는데, 이런 엑소더스가 남자현의 결행을 자극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내부 저력을 축적하고 있는 가운데 1919년이 되었고 3.1운동이 일어난다. 운명의 신이 남자현의 삶을 180도로 바꿔놓는 바로 그 뜨거운 함성의 순간이 닥쳐온다.                  이상국 아주T&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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