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을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그릇이 있다. 그릇 바닥에서 아가리(입)에 이르면서 차츰 벌어져 올라가는 역삼각형 형태로, 입지름이 높이에 비해 긴 그릇을 사발이라고 한다. 그냥 둥근 사각에 가까운 밥공기와는 좀 다른, 국이나 술을 담아먹는데 사용되는 그릇이라고 사전적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차사발이나 국사발에 밥을 담아 먹으면 밥사발이지 굳이 차(국·술)사발과 밥공기를 구별할 이유는 없다. 밥 먹고 물말아 먹기 좋은 그릇이 ‘사발’이다.
요즘은 웰빙 음식으로 간편한 아침 식사의 대명사인 ‘죽’은 과거 한때는 가난을 상징했다. 보리죽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죽사발이 웃음이요, 밥사발이 눈물이라’도 이런 예다. 이는 죽이 밥에 대해 가난을 의미하나, 가난하게 살더라도 근심 없이 사는 게 좋다는 속담이다. 사실 먹는 것은 변변치 않은 것을 먹더라도 근심없이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속뜻이 담긴 좋은 이야기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발’은 ‘사람’과 같은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와 같은 고난의 시기를 거쳐 우리곁으로 찾아온 것이다. 유명한 화가인 폴 고갱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예가이기도 하다. “도자기는 지옥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고 말한 그의 말처럼 땅속의 보물인 좋은 흙[地]은 불과 공기[天]의 힘을 빌은 도예가(人)의 혼으로 세상에 나온다.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든 신처럼 도예가들의 흥겨운 흙놀이로 만들어진 사발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밥사발’로 ‘차사발’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런 신통방통한 사발은 너무나 일반적이기에 도예가들이 오히려 제대로 배울 길이 없었다. 1980년대 찻잔을 배우고 싶어도 이를 가르치는 정규 과정이 없을 당시, 박종훈 단국대 도예과 석좌교수는 잔과 사발을 처음으로 대학 교과과정에 정착시켰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차 도구와 관련한 잔과 사발 그리고 주전자 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국내 찻잔과 찻사발의 체계를 세워온 그가 이번엔 작심하고 그의 40년 도자 인생의 모든 것을 보여줄 각오로 다양한 장르의 찻잔 500여 점을 전시한다. 사발의 대중화, 국내 도자기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실용적인 찻잔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내놓았다.
박 교수의 개인전 '박종훈 찻잔'전은 11일부터 오는 19일까지 창덕궁 정문 앞 가림막 뒤에 있는 한국문화정품관갤러리(gallery.koaashop.com)에서 열린다.
※ 도예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 온 박 교수의 물레 솜씨에 반한 중국의 징더쩐(경덕진)도자학원은 그를 객좌교수로 초청했으며, 자사호의 고향 이싱의 우시공예학원은 그가 있는 단국대 도예연구소와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그는 강진도예학교 설립, 문경찻사발축제 물레경진대회 심사위원장 역임 등 도자공예 활성화를 위해 각 지역과의 교류·협력에도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