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이 글로벌 무역시장에서 치열하게 경합 중인 가운데 역대급 '엔저(엔화 가치 약세)'라는 복병이 출현했다. 엔화 가치 약세는 일본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우리나라 수출기업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수출 반등으로 회복세를 보이던 무역수지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하다. 엔화값 하락에 연말 휴가 시즌이 더해져 일본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여행수지가 추가로 악화할 가능성도 높다.
최근 국내 무역수지 규모는 지난 6월 이후 5개월 연속 흑자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무역수지는 16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고 특히 수출이 지난해 9월(2.3%) 이후 13개월 만에 전년 동월 대비 증가했다. 주요 흑자국은 동남아(60억1000만 달러), 미국(38억7000만 달러) 등이며 주요 적자국으로는 중동(-62억3000만 달러), 중국(-15억6000만 달러), 일본(-14억3000만 달러) 등이 이름을 올렸다. 올 들어 누적 무역수지는 여전히 181억1100만 달러 적자다.
이런 가운데 세계 수출 시장에서 우리나라와 경쟁을 펼치는 일본 기업들이 엔저를 등에 업고 가격 경쟁력을 강화하는 추세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강민석 교보증권 연구원은 "단순 환율 변동이 아닌 양국 수출 가격이 중요하다"며 "최근 두 나라 수출물가지수(달러화 기준)를 살펴보면 한국 수출 가격이 오히려 상대 우위에 있어 엔저로 인한 가격 경쟁력 약화는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공급자 간 제품의 질적 차이가 크지 않은 철강이나 석유 등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엔저 효과에 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다. 일본 중앙은행이 주도하는 엔저가 상당 기간 지속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날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올 3분기(7∼9월) 실질 국내총생산(GDP·계절조정 전기 대비 속보치) 성장률은 -0.5%로 역성장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물가 상승에 따른 일본 내 개인 소비 위축과 기업의 설비투자 부진이 마이너스 성장을 야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내년 이후 일본이 기존 완화적 통화정책을 다소 긴축적으로 선회할 가능성을 제기해 왔지만 경제 성장률이 둔화하면 이 같은 시도에 나서기 어렵다. 엔화 가치 약세 기조가 쉽게 꺾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는 지난 9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파이낸셜타임스(FT)가 주최한 글로벌 보드룸 콘퍼런스에 참석해 "우리는 물가 상승률을 2%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에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면서도 "단기금리 정상화를 결정하기엔 아직 너무 이르다"고 언급해 당분간 기존 통화정책을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