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연구는 AI, 반도체 등 공학적 지식과 함께 의학 지식을 두루 갖춘 '의사공학자'를 통해 이뤄진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의사공학자(MD-PhD)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다만 학계에선 한국에서 의사공학자의 길을 걷는 사례는 의대 졸업생 중 1%도 채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과기의전원) 설립에 속도를 내겠다고 12일 밝힌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의사 면허를 가진 과학자·연구자가 임상 분야 전문성을 살리는 융합 연구를 지원하고 미래 산업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KAIST 고위 관계자는 "우리가 길러낸 의사공학자 의사면허는 개원을 위한 것이 아닌 과학 연구를 위한 것"이라며 "의사만 접근할 수 있는 연구 영역이 있으며 이들은 임상 현장과도 쉽게 소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광형 KAIST 총장은 지난해 취임 1주년 간담회에서 과기의전원 설립 청사진을 밝힌 바 있다. 과학기술과 의학을 융합하는 석·박사 통합과정을 KAIST가 맡겠다는 계획이다. 과기의전원 출신은 기존 의사와는 전혀 새로운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생리학이나 해부학뿐만 아니라 프로그래밍, 빅데이터, AI 등 미래 의료를 위한 교육도 진행한다.
KAIST는 의과학대학원을 이미 20여 년간 운영하고 있다. 의사면허를 보유한 이들이 과학 지식을 추가로 습득하는 곳이다. 다만 그동안 의과학대학원 졸업생이 연구소 대신 병원(임상)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많다는 지적을 받았다. 나이·가정이 있는 만큼 연구 대신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의료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기존 의과학대학원 학제에선 공학 분야를 전문적으로 교육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었다.
이에 KAIST는 의사들이 젊은 시절부터 연구에 재미를 느끼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과기의전원을 설치하고 실험과 연구 중심인 '디지털 병원' 기능을 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다만 일각에선 과기의전원 설치가 의사면허를 우회적으로 획득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우려한다. KAIST 측은 과기의전원 졸업자가 임상으로 가는 것을 임의로 막는 등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대신 그간 의료계가 젊은 의사에게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의사공학자 길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과학계에선 KAIST에 이어 향후 다른 과기특성화대에서도 과기의전원 설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본다. 이는 의대 정원을 지속해서 늘리겠다는 정부 방침과 무관하지 않다. 의대 정원 확대 흐름 속에서 과기특성화대들이 의사공학자 양성 지분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KAIST 고위 관계자는 "과기의전원은 현재 의학 교육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을 해결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지금 모자라는 의사가 아니라 앞으로 필요한 과학자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사공학자 수는 전체 의대 정원에 비하면 소수"라며 "의사공학자로 인해 임상에서 의사 부족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