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권리' 돕는 디지털 장의사…업계 "시장은 이미 레드오션"

2022-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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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기업마저 없어지는 추세, 다른 사업 병행 않으면 생존 불가능

정부 역할 필요하지만, 디지털 장의사 기업과 협업·공존 바라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인 N번방 '갓갓' 문형욱(왼쪽)·박사방 '부따' 강훈(오른쪽). [사진=연합뉴스]


#. 2020년 재수생 A씨(19, 여성)는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촬영된 동영상이 트위터에서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A씨가 화상채팅 중 상대방이 녹화했고 이를 국내와 해외 사이트에 올린 것이다. A씨는 부모님께 말도 못하고 1년 동안 전전긍긍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디지털 장의사 업체를 찾았다. A씨는 인터넷 게시물로부터 잊혀지고 싶다고 간청했다. 

#. 
전 여자친구로부터 디지털 성범죄 촬영 및 유포로 고소당한 30대 남성 B씨는 인터넷 게시물로 고통을 겪었다. B씨는 "단 한번도 촬영한 적 없다"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정을 가야만 했다. B씨는 디지털 장의사를 찾아 자료 취합과 분석을 의뢰했고 영상에 나오는 신체인 귓불, 손가락 등을 분석해 다른 사람임을 입증했다. 법원은 해당 인물이 B씨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최근 N번방 등 디지털 성범죄와 악성 댓글 등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잊힐 권리’를 돕는 디지털 장의사가 주목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관련 시장 전망을 두고 현장에선 의견이 갈린다. “디지털 장의사는 이미 레드오션”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지금보다 시장이 나아질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디지털 장의사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도울 때 성취감 생겨"
 
3일 아주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디지털 장의사들은 “범죄 피해자나 범죄자로 오해를 받는 사람을 도와 ‘잊힐 권리’를 실현시킬 때 성취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잊힐 권리는 인터넷에서 자신과 관련된 각종 정보에 대해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국내에는 잊힐 권리가 법제화 되지 않았지만 유럽은 잊힐 권리를 인정하는 EU사법재판소 결정 이후 '일반정보보호규정' 제정을 통해 법제화했다. 잊힐 권리를 원하는 사람의 의뢰를 받아 인터넷에 올려진 게시물을 삭제해주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디지털 장의사다.  

국내 최초 ‘디지털 장의사’로 유명한 김호진 산타크루즈 컴퍼니 대표는 “디지털 성범죄(비동의 성적 촬영물)나 몰카 등 의뢰가 많이 들어온다”며 “가슴 아프지만 이런 일을 할 때 사명감이 들고 때로는 뿌듯하다”고 말했다.
 
 ◆ 4차 산업혁명 유망직종 선정에도··· 업계 "과다 경쟁, 기업 역할 축소로 시장 우려"
 

‘잊힐 권리’와 4차 산업혁명이 떠오르면서 한국고용정보원은 디지털 장의사를 유망직종으로 선정했지만 디지털 장의사들에 따르면 업계 전망은 밝지 않다. 이들은 ‘시장 과다 경쟁’, ‘정부의 시장 개입’ 등을 근거로 들었다.  

디지털 장의사와 계약은 보통 2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삭제를 원하는 게시물 건당으로 계약하거나 수개월 단위로 장기 계약을 하는 식이다. 국내 게시물의 경우 일반적으로 건당 3~5만원, 해외 게시물의 경우 5~10만원을 받는다. 기간을 두고 관리를 원하는 계약은 연예인이나 유명 크리에이터들이 많이 찾는다. 월 단위로 100~200만원 선인 경우가 많지만 이슈나 규모에 따라 1000만원이 넘어가기도 한다. 
 
비싼 가격으로 상당한 수익을 자랑할 것 같지만 과다경쟁으로 수익이 많지 않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안재원 클린데이터 대표는 “현재 20개 안팎의 업체가 있는 디지털 장의사 업계는 이미 의뢰 사건에 비해 ‘레드오션’인 구조”라고 규정했다. 안 대표는 “디지털 장의사 시장은 몇몇 대형 업체 입지가 공고해 후발 주자가 시장에 진입하기 어렵다”며 “오히려 기존 디지털 장의사 업체도 다른 사업을 병행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했다.
 
디지털 장의사들이 업계 전망을 불투명하게 보는 또 다른 원인은 정부 기관의 시장 개입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디지털 성범죄 긴급대응팀을 운영하고 있는 지점에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 긴급대응팀은 모니터링을 한 뒤 사안에 따라 사이트를 차단하거나 삭제를 요청한다. 정부 기관이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디지털 장의사 일거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안 대표는 “정부가 피해자 보호를 위해 나서는 것은 필요하지만 디지털 장의사 기업과 협업·공생할 방안을 고민하면 좋겠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디지털 장의사 대표 A씨도 “정부가 나서는 것을 나쁘게만 보지는 않는다”면서도 “다만 정부 역할 확대와 인공지능 시스템이 개발될 우려까지 고려하면 디지털 장의사 업계 전망이 밝지 않다”고 했다.

김 대표는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된다면 디지털 장의사 시장이 개선될 것으로 내다봤다. 김 대표는 “4차 산업혁명으로 정보 관리 중요성이 커지고 기업과 정부 기관이 평판 관리, 허위 조작 정보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면 지금보다 단체 차원 의뢰가 많아져 시장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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