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섬기면 종교된다" 다석이 경계

2021-01-20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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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② 윤정현 성공회 신부 <下>


 

 
 윤 신부와 나는 1955년생 양띠 갑장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교과서(국정)를 읽고 박종철 사건을 비롯해 동세대의 경험을 공유했다는 이야기다. 나이를 알고 나니 또래집단(cohort) 의식이 생겼다. 윤 신부가 차를 따를 동안에 서울서 갖고 간 내 저서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을 내놓았다.
 내가 “제가 3년 전에 쓴 책인데요. 박종철 탐사보도가 6월 항쟁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는 관점에서 썼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6월항쟁이면 제가 사제 서품받았을 때인데…”라며 책을 들춰봤다. 나중에 보니 “없이 계시는 하나님” 박사학위 논문 첫머리의 ‘연구동기와 목적’ 주석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언급돼 있었다.
 그는 대학입시에서 공과대학을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재수 학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대화를 하던 중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했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고자질하는 바람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얽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을 산 전과 때문에 공대를 나와 가지고는 취직이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 연세대 신학과에 들어갔다.

독재정권 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윤정현 신부가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 책을 보고 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춘천교회 부제로 일하면서는 강원대 한림대 학생들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춘천에는 군인 가족과 보수적인 이북 출신 주민이 많이 살았다. 누군가 교회 간판을 떼어가기도 했고 취객이 밤중에 교회에 들어와 “누가 힘이 센지 윤 신부 나와 한번 겨뤄보자”고 소리 지르는 일도 있었다. 1990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현 NCCK)에 파송돼 선교훈련원 간사로 일했다. 그 무렵 윤석양 이병이 KNCC 사무실에서 보안사 민간인 사찰 문건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윤 신부는 기자회견을 마친 윤 이병을 경찰의 감시를 뚫고 밖으로 빼돌리는 일을 성공시켰다.
이런 삶의 이력을 알고 나서 박종철 책을 선물로 챙긴 선견지명(先見之明)에 잠시 흐뭇했다. 신부도 족보를 따지는지 그의 책꽂이에는 ‘파평윤(尹)씨 참의공파보(參議公派譜)’같은 책이 꽂혀 있었다.
-하늘나라에 가면 몰라도 이 세상에선 먹는 것이 중요한데요. 하루에 몇끼 식사를 하십니까?
”저도 한때는 다석 선생을 닮기 위해 하루 한 끼를 먹었습니다. 다석 선생은 하루 한 끼를 저녁 무렵에 드셨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사목을 하다보니 신도 집에 초대받으면 불편했습니다. 초대받았는데 안 먹을 수도 없고요. 여기서는 산에서 육체적 노동을 하다 배가 고프면 먹고, 고프지 않으면 안 먹습니다. 하루에 한 끼 먹을 때도 있고, 두 끼 먹을 때도 있습니다.
-하루 세 끼를 규칙적으로 먹어야 건강하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저는 배꼽시계에 따라 먹습니다. 아침은 먹지 않습니다. 1983년 정도부터 안 먹었습니다.”
-옛날에 한국 사람들도 겨울에는 해가 짧고 식량이 부족하니까 1일 2식을 했습니다.
“서양도 1일 3식한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요. 중세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한끼도 했습니다. 아침에는 아주 간단하게 하고 저녁을 정찬으로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잉여농산물이 많으니까 잘 먹는 거지요. 서양에서도 중세 때는 수도원에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 한 끼를 먹었다더군요. 그래서 배고픔을 잊게 하려고 3시간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 아홉 번. 그 정도로 서구도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
-이 집에서 거주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계속 고영재(顧影齋)에 있다가 작년 봄부터 옮겨왔습니다. “
귀향 초기에 윤 신부는 반암골 산기슭에 컨테이너를 들여놓고 살았다. 쇠로 된 집은 여름엔 달구어진 깡통 같았고 겨울엔 냉장고로 변했다. 그래서 컨테이너 바깥 쪽으로 흙벽을 쌓고 지붕을 얹고 골방을 만들어 붙였다. 철제컨테이너와 흙벽의 복합건물이다. 식수는 계곡물을 끌어다 탱크에 받아 썼다.
고영재라는 현판은 청주의 운당 이쾌동 선생이 써준 글씨다. ‘고영’은 그림자를 돌아본다는 뜻이다. 책을 읽을 때 활자 뒤에 숨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차를 마시면서 사물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논한다는 의미다.
 

 선석농원의 유산양들. 왼쪽이 윤정현 신부.[사진=유수민 인턴기자]


고영재 옆 선석농원에서는 개들을 사육하고 젖을 짜는 유(乳)산양을 몇 마리 기른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밭 두어 뙈기가 전부다. 반암골은 예부터 선인취와혈(仙人醉臥穴)이라고 불렸다. 선인들이 내려와 취해 누운 골짜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선’을 따고, 그가 평생 연구하는 유영모의 아호인 다석(多夕)에서 ‘석’을 가져와 선석이라 지었다. 산양고기는 먹지 않고 새끼를 낳고 죽으면 그냥 묻어준다. 정이 들어서 먹을 수가 없다.
아내가 양육하던 성씨의 시조들이 하나 둘 오면서 추위를 피할 곳을 찾게 됐다. 고영재에서 1.5km 떨어진 반암 마을에 건설업자가 지은 집 한 채가 법적 분쟁에 휘말려 귀곡산장처럼 잡초가 우거진 채 11년째 비어 있었다. 부도가 나서 경매에 나온 것을 육촌이 덜컥 낙찰 받으니 집안싸움이 벌어졌다. 윤신부가 대출을 껴안고 사들여 수리하고 페인트칠 하니까 살 만해졌다.
이 집의 당호를 인월재(引月齋)라 지었다. 덕산으로 솟아오르는 달을 끌어들이는 집이다. 내가 찾아갔을 때 마당에서 바둑이(스피츠) 여덟 마리가 뛰어 놀았다. 무척 순한 종자다. 윤 신부가 한 마리 가져가라고 했지만 나는 집에서 고양이를 기른다. ‘달형제’라는 분이 쉼터의 어린이를 안고 있었다. 달형제는 매년 산티아고 순례길 300km를 맨발로 걷는 사람이다.
-인월재, 고영재… 한문 이름을 좋아하는군요. 다석 연구도 한문을 모르면 하기 어려웠겠지요. 언제 한문 공부를 했습니까?
“80년도에 광주 항쟁 때 계엄령으로 학교가 문을 다 닫았잖아요. 그 때 피신해있다가 집에 내려와 서당에서 공부했어요. 그 뒤로는 연세대 이가원(李家源) 교수 반에서 한문강의를 들었습니다. 학부 졸업 후에도 계속 혼자서 공부를 했지요.”

인간이자 사상가 예수를 후대인이 신격화

-고창에 영성공동체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들었는데요.
“여기서 한 6km 떨어져 있어요. 이길재 선생이 은퇴해 고창군 부안면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분이 선대로부터 받은 땅이 십 만평 있는데 4년 전부터 같이 재단법인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류영모 사상, 광주 동광원을 설립한 ‘맨발의 성인’ 이현필의 가난 정신, 동학혁명의 성지니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이어받아 함께 농사도 짓고, 생활수도회와 같은 영성공동체를 만드는 작업을 했거든요. 재단법인을 설립하려면 기본자산이 20억 원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 땅이 공시지가로 그렇게 안돼서 잠깐 보류하고 있는 거예요.”
 반암리에는 동암 백남운의 생가가 보존돼 있다. 연희전문 교수였는데 월북해 북한에서 초대 교육상을 했고 최고인민회의(국회) 의장도 지냈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여기에 남아 있는 후손들은 박해를 받아 어렵게 살았다. 반암 마을에는 인촌 김성수 전 부통령의 할머니 묘와 제각(祭閣)도 있다. 윤 신부는 이곳이 정감록 비결에 나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여서 묘가 많다고 말했다.
-다석이 훈민정음이나 한글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더군요. 그런데 한문을 번역한 순 우리말이 더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쉽게 설명해주시죠.
”다석은 한글 가지고 놀이를 하셨습니다. 글자를 합성해서 그림문자 같은 걸 만드셨습니다. 여러 한글 자모음 조합을 통해 입체감 있게 강의안 한 장에 그려넣었지요. 그걸 가지고 두, 세 시간 강의를 하셨습니다. 어렵지만 반복해서 읽다 보면 이해가 됩니다.
다석은 아래아(ㆍ) 반치음(ㅿ) 옛이응(ㆁ) 여린히읗(ㆆ)이 없어진 걸 아쉬워했습니다. 우리가 옛한글 중에 쓰지 않는 4가지를 사용하면 세계 어느 나라 소리도 다 표현할 수 있는 문자입니다. 네모와 세모와 원 안에 한글 자모가 다 들어갑니다. 천지인 사상이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가온찍기 한 사람이라고 해석합니다. 네모에 열 십자를 해서 가온을 찍습니다. 인간 예수가 하느님과 소통하는 가온찍기를 해서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간디도 그냥 간디인데 ‘마하트마’는 위대하다고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인간 예수인데 사람들이 존경한 나머지 예수를 높이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예수가 된 것이죠. 그러한 그리스도를 류영모는 가온찍기라는 말로 다 표현합니다.
서양의 신론과 동양의 신론에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은 눈에 보이는 것에, 동양은 ‘무(無) 허(虛) 공(空)’에 관심이 큽니다. 도덕경이나 불교의 공사상 노장사상의 허, 무 사상은 비(非)존재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서양은 존재가 아닌 것은 그냥 물음표로 남깁니다. 다석 류영모에서는 유무(有無) 상통(相通)합니다. 하나의 존재에서 있음(有)과 없음(無)이 공존하고 그 자리에 절대자가 계시다고 한 것이죠. 그것이 동양적인 개념입니다. 하느님은 존재라는 개념에서 보이고 느껴져야 하는데 하느님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안 보입니다. 그럼 비존재인가? 무인가? 그건 아닙니다. 영적으로 계십니다. 유무 상통하기 때문에 있으면서도 없고, 없다고 하자니 영적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신의 개념을 유무상통으로 ‘없이 계신다’고 설명한 것이죠.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의 사상을 통틀어서 설명해냈습니다.”

함석헌, 다석의 '씨알' 대신 옛글 쓴 속사정

-다석의 조어(造語) 가운데 씨알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데 씨알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죠? 류영모와 함석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다석이 1959년 도덕경을 순 우리말로 완역했는데 백성 민(民)자를 그때 ‘씨알’로 번역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다석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씨알’이라는 말을 좋아했습니다. 그때 다석은 함석헌 선생의 인기에 가려져 있는 분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 유신헌법과 억압정치 상황에서 함 선생이 권위주의 정치에 저항하는 운동을 했습니다. 그때 냈던 잡지가 ‘씨알의 소리’인데, 백성들의 소리, 스스로 외치는 소리라는 뜻이죠. 70년대 ‘씨알의 소리’를 낼 때는 류영모 선생과는 결별한 상태였습니다. 60년대 초반까지는 류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각별했습니다. 그즈음 함 선생의 여자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그 뒤로 다석은 함석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함 선생은 다석을 끝까지 모셨습니다. 다석이 내다보지도 않는데, 집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나의 해석인데 류영모 선생이 ‘씨알’을 쓰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함 선생은 ‘알'을 옛글 '아래아 알'로 쓴 것이죠.”
 

 씨알의 소리 통권 50호 표지


-그때 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다석을 잘 모르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류영모를 함석헌의 스승 류영모로 알았지요?
“류영모 선생은 제소리를 내라고 했고, 제소리를 낼 줄 알면 찾아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일종의 졸업을 시키신 것이죠. 그런데 졸업생 함석헌이 더 커버렸지요.”
언론인 이규행은 “다석이 이승을 떠났을 때 부음(訃音) 한줄 신문에 나지 않았다”며 매스컴의 허망함과 지식인의 맹점을 드러냈다고 자책하는 말을 했다. 그러나 다석이 부음 기사에 실릴 만큼 세속적으로 유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함석헌은 유신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하며 윤보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할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마하트마 간디는 13살에 혼인해 37살에 금욕생활에 들어갔다. 류영모는 25살에 혼인해 51살에 금욕생활에 들어갔다. (박영호 저 ‘다석전기’).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다석의 해혼(解婚)과 금욕이 극단주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1942년 가정생활을 하면서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개 인도사람들을 보면 마흔이 됐을 때 출가를 합니다. 다석은 52살 때 정신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가정생활을 중요시 않고, 정기를 태워서(바탈태우), 우리가 하느님의 자리까지 올라가서 소통하는 에너지로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가정생활을 하지만 부부생활은 안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윤 신부는 인터뷰 중에 “다석을 존중하되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다석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석을 성인으로 높일 뿐 아니라 신화화해서 세계 5대 성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분도 인간이고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도 남을 섬기면 우상숭배라고 하셨는데 후세 사람들이 예수님도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천주교는 더 심해서 예수님을 낳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자리까지 올렸습니다. 나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석도 사람을 섬기면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섬기지 말라고 하셨죠. 다석 본인도 본인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상이든 체계화하면 종교가 되게 마련입니다. 다석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석 사상에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녹아있다고 말씀하시는데…동학이 백성을 최고의 가치에 두는 철학은 좋았지만 주술, 부적같은 것은 미신이라고 비판 받을 수 있지요.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의 복장(腹藏)에 있는 비기(祕記)를 손화중이 꺼내가서 군사가 많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선운사 도솔암이 미륵신앙의 중심지입니다. 메시아 사상처럼 미륵세계가 올 거라는 신앙이죠.”
손화중 장군의 삶을 성공회 신부의 설명으로 풀어본다. 고창 무장현에서 전봉준 장군이 접주인데, 손화중 장군은 접주를 거느리는 포주였다. 그래서 따르는 신도와 군사가 많았다. 세력도 크고 인품도 있고 공부를 많이 한 선비였다. 세상을 새롭게 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전봉준이 몇 번 찾아왔다. 처음에는 손화중이 상대를 안 하다가 전봉준이 계속 와서 설득하니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동학운동을 처음 시작한 창의문 낭독에 손화중이 나간 것이다. 비결서를 가졌다고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이 따르고 신격화할 것이 아닌가. 비결서의 존재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대개 우리가 절이나 불상을 조성할 때 기록 같은 걸 넣는다. 그런데 검단선사가 도솔암을 만들고,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복장에 불경이나 조성 경위를 적은 유물을 넣었을 것이다. 비기(祕記)가 전설로 내려온 사연이다. 

손화중의 전설이 서려 있는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사진=황호택]


이 일대에는 전라관찰사 이서구의 일화가 많이 있다. 이서구가 전라관찰사로 와서 비결서가 있다고 하니 꺼내보려고 했다. 그런데 열어보다가 벼락이 떨어져 ‘전라관찰사 이서구가 본다’라는 대목만 읽고 덮었다. 여기에 손화중이 이서구가 보지 못한 비결서 내용을 다 보았다는 전설이 붙은 것이다. 아마 비결서를 갖고 있다는 말 때문에 농민군이 많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을 엿볼수 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총을 가졌는데 농민군은 부적을 품고 죽창으로 돌격하다가 실패했는데…?
”동학군도 총을 피하기 위해 큰 대나무 방패를 밀면서 가기도 하고 나름대로 전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식 총이 워낙 위력을 발휘하니까 겁나서 도망가다 서로 넘어지면서 죽은 경우도 많습니다.“

 천부경도 배달민족 사상이 구전되다 기록된 것

-대종교의 천부경에 대해서 사학계가 위서(僞書)로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천부경을 다석이 해석한 것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하나요?
”예수님의 말씀도 나중에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도 옛 어른들이 말로 ‘창세기에 어떻더라’는 이야기가 율법사들을 통해 구전(口傳)되다가 기원전 500년 경에 문자로 기록이 된 것 아닙니까. 그와 같이 천부경도 배달민족의 사상이었는데 나중에 내려오는 얘기들이 기록됐다고 봅니다. 그 기록이 역사적으로 실증할 수 있는 자료냐, 이런 것보다도 우리 민족의 사상, 철학을 엿볼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구전으로 ‘단군은 이런 분’ 이라는 식의 이야기들이 내려왔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사상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석은 중국과 다른 우리 민족 고유 사상을 찾고 해석했습니다. “
인터뷰를 마치자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렸다. 윤 신부의 안내로 심원 앞바다 ‘금단양만’이라는 식당에 가 고창 복분자주에 장어를 먹었다. 이제 자연산 장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 인공부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아 치어를 사와 사료를 먹여 키운다.
신부는 식당에서 장어를 손질하고 남은 부스러기 고기를 받아 다시 고영재로 왔다. 개들이 밥을 가져온 줄 알고 꼬리를 치며 달려왔다. 산양들도 내려왔다. 윤 신부는 바로 옆 국가지질공원으로 우리를 데려가 병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술병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병바위를 오르는 마삭덩굴과 담쟁이들은 암벽 타기에 지친듯 모두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 박하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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