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혁신기업 순서가 재벌 순서? 잣대 문제 있다

2020-12-1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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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인 증권부장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한번씩 ‘공시 대상 기업집단’을 지정해 발표한다. 자산 총액이 5조원 이상인 기업집단이 그 대상이며, 이들 기업 중 그 금액이 10조원을 넘어가면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도 지정된다.

이를 통해 국내 대기업의 자산 순위를 확인할 수 있는데, 2020년 5월 기준으로 공기업을 제외하면 삼성-현대자동차-SK-LG-롯데-한화-GS-현대중공업-신세계-CJ 순이다. 그동안 상위 기업들은 부침을 겪었지만 제조업 기반의 회사들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그 공식을 미래에셋그룹이 깨고 2016년 20위권에 오른 뒤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도체나 자동차 회사는 글로벌 플레이어가 될 수 있어도, 금융은 단순한 국내 기업에 머물 것이라는 통념을 깨버리고 순수 금융회사가 대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관련 언론 보도를 보면 해당 기업집단과 통상 ‘재벌기업 순위’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도 소위 대기업과 재벌의 구분을 정확히 따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과 재벌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대기업은 말 그대로 자산 규모가 일정 규모 이상 되는 기업집단을 일컫는다. 법적으로는 중소기업 및 중견기업에 해당하지 않는 기업과 위에서 언급한 공정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이 해당할 것이다.

재벌의 의미는 재계에서 큰 세력을 가진 독점적 자본가나 기업가의 무리 또는 일가나 친척으로 구성된 대자본가의 집단을 말한다. 거대 자본을 가진 경영진이 가족, 친척 등을 주축으로 혈연적 기업체를 이룬 것이다. 일본에서 정치와 결탁한 상인집단에서 출발한 ‘자이바쓰(재벌·財閥)’가 어원이나 한국의 그것과는 의미가 많이 다르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전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과 같이 재벌가가 실질적 대주주이면서 계열사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갖는 우리나라와 같은 체제가 존재했다. 하지만 패전 후 연합군이 비군사화, 경제민주화, 평화시기 경제보존 등을 내세우면서 해체 수순을 밟았다.

다른 외국의 사례에서도 소위 재벌이라 할 수 있는 기업집단의 모습은 확인할 수 있다. 영국·프랑스에 걸쳐 많은 금융기관을 지배하고 있는 로스차일드가 있고, 미국에는 8대 재벌로 손꼽히는 멜런·모건·록펠러·듀폰·쿤로브 및 보스턴·시카고·클리블랜드의 지방재벌 등이 있다. 독일의 크반트 가문이나 인도의 타타그룹도 해당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혈연적 경영집단으로서의 성격은 약하고 일종의 카르텔(cartel)·트러스트(trust)·콘체른(konzern)과 같이 기업 간의 결합형태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재벌의 형성과정은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광복 직후 취해진 귀속재산의 특혜적 불하, 원조물자의 특권적 배정, 은행의 특혜적 융자는 1950년대 재벌 형성의 물적 기초로 작용한다. 특히 원재료와 자본재를 원조에 의존하면서 크게 성장했던 3백(三白)산업(제분·제당·면방공업)은 우리나라 재벌들이 부를 축적하는 계기가 된다.

1960년대 수출 주도적 경제성장을 목표로 세운 정부의 지원은 주로 기업경영 경험이 있는 소수의 기업인에게 집중된다. 기초를 다진 주요 재벌기업들은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확대된다.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추진과 종합무역상사 육성은 대규모 기업이 필요했기에 기존 성장 기업 중심이었다. 재벌은 기간산업을 장악하고 다수의 대규모 기업을 운영하면서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했다.

1970년대 말 세계적 불황에 따른 수출 감소, 제2차 오일쇼크 등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재벌들은 구조조정 과정을 겪으며 1980년대 이후 그 지배구조를 강화해 갔다. 불황기에 주요 중화학공업 부문의 통폐합에 따라 경쟁력을 회복했고, 부실기업 정리를 통해 대대적인 자본집중을 이뤄낼 수 있었다. 1980년대 정부가 추진한 개방체제로의 이행과 민간주도 경제는 재벌 지배력을 촉진시켰다. 광공업 분야에서 중소기업과의 하도급 계열화 관계의 확대를 통해 그 지배력을 강화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정부의 재벌 개혁정책이 실시되고, 정부는 금융기관을 통한 자금의 유동성을 통제함으로써 재벌들의 개혁을 촉구하게 된다.

한국의 재벌은 우리나라 경제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강력한 추진력을 통해 커다란 기여를 했고, 규모의 경제를 가져와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재벌의 독과점적 지위와 문어발식 확장, 소유·지배구조에 따른 경영의 비효율성 등 부작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2~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불투명한 상속 과정에 따른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흔히 대기업과 재벌을 혼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독특한 기업 형태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혈연으로 엮인 ‘재벌’에서 시작됐고 또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성장하는 기업들이 탄생하고 이들이 규모를 키워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단순히 규모가 크다고 이들을 여타 재벌들과 같은 잣대로 줄서기시켜 평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시대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

공시대상 기업집단에는 미래에셋을 비롯해 네이버, 넷마블, 카카오 등과 같은 신흥기업들이 몇 년 전부터 오르고 있고, 올해는 PEF가 첫 등재되기도 했다. 공시대상 기업집단은 재벌 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고 편법적인 지배력 강화를 막기 위한 제도다. 이들은 상당수가 전문경영인 체제로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성장과정도 기존 재벌집단과는 확연히 차별화된다. 글로벌 시장에서 죽기 살기로 경쟁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냉혹한 현실에서 국내 기업들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잣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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