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이 유행하고 있다.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이 세계적인 찬사를 받으면서 ‘K-방역’이 국내에서는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 잡는 사이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방탄소년단의 ‘다이나마이트’가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랐다. 명절마저 온라인으로 맞이해야 하는 국민들에게는 손흥민의 골잔치도 짜릿한 기쁨이 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이 분위기에 편승하면서 ‘K-방역’, ‘K-안전’에 이어 ‘한국판 뉴딜’, ‘한국형 기본소득’, ‘한국형 재정준칙’ 등이 난무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장기화는 4차 산업혁명으로 초래될 사회경제적 변화의 속도를 더욱 높일 것이라는 예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단된 한국 노동시장이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취업자와 실업자의 분단으로 중첩될 전망이 우세하다. 그 결과가 불평등의 가일층적인 심화로 나타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당초 간단할 것처럼 보였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여당의 해법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면서 정권의 국정철학마저 도전을 받고 있다. 이재명 지사는 3차, 4차 재난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벌써부터 주장하고 있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기획재정부이다. 기재부는 특히 1차 재난지원금에서 당한 수모를 3차 재난지원금을 저지할 제도적 장치로 풀고자 ‘한국형 재정준칙’을 구상했다. 하지만 ‘한국형 재정준칙’을 2025년부터 적용하려는 방침도 ‘재정건전성’ 달성을 차기 정부에 떠넘기던 과거의 무책임한 관행을 반복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가채무비율 60%, 통합재정수지 –3% 중 하나만 맞추면 준칙을 충족한 것으로 설계되어 있어 준칙의 실질적인 구속력도 의문시된다. 재정수지 –3%는 유럽연합이 채택하고 있는 기준이라지만, 국가채무비율 60%는 문재인 대통령의 질책을 받았던 예전의 40%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마치 국가채무비율은 상승할 뿐 하락할 수 없는 것처럼 설계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재정준칙이 기재부의 정책 시야를 넘어서는 복지정책 제안은 잘라버리는 그리스 신화의 ‘프루크루터스의 침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관련기사
놀라운 것은 야당 비대위원장의 행보이다. 그가 당 정강·정책에 가장 먼저 강조한 기본소득을 개념에 근접하게 지급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소요될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투입이 확산될수록 이 재원을 마련하는 생산에서 인간의 노동이 설 자리는 좁아질 것이다. 크게 본다면 선택지는 노동시장의 외부유연성과 내부유연성 둘뿐이다. 경제 전체의 노동량(총노동시간)이 줄어드는데 개인별 노동시간을 유지하면 실업자는 양산되고(외부유연화) 생산물의 공정한 재분배가 핵심과제가 될 것이다. 반면에 총노동시간이 줄어들 때 내부유연화로 개인의 노동시간도 줄어들면 고용량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핵심과제는 개인 노동시간의 공정한 분배가 될 것이다. 외부유연성이 선택되면 진보적 어젠다인 기본소득은 대량실업으로 극우의 어젠다로 변질될 것이다. 여당이 추진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진흙탕에 빠져 있는 사이에 노동시장 유연화 문제를 야당 비대위원장이 정면으로 거론하고 나선 것이 극우 버전을 향한 사전작업이라면 한국 사회에는 좋지 않은 시나리오이다. 이 시나리오가 우려되는 것은 그가 ‘5·18정신’과 ‘태극기 부대’에 양다리 걸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