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으면서 여야 사이에 이념적 ‘자리바꿈’이 일어나고 있다. 야당이 되살아나기 위해 5·18 사죄를 포함하여 정강정책의 혁신을 표방하는 사이에 여당은 좌표를 잃고 정책이념적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다. 여당의 개념 없는 퇴행은 특히 2차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논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1차 지원금에서는 개인을 지급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 정신은 구현되었다. 하지만 2차 지원금에서는 ‘선별’과 ‘보편’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전 국민’을 위한 소득보전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고용노동부처럼 2차 지원금을 ‘긴급고용안정지원금’으로 이해하게 되면 ‘사람’을 위한 ‘소득’이라는 구상과 거리가 멀어진다. ‘선별’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차별성을 피하기 위해 ‘맞춤형’이라 불러도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선별’ 지급하는 이유가 ‘어려운 국가재정’ 때문이라는 변명은 재정정책의 목표를 국민생활의 안정이 아니라 재정건전성의 유지에 두는 ‘전도된’ 재정정책 구상에 기인한다.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론’에서 출발하는 이 구상은 국가채무비율을 국가신용도의 중심에 둠으로써 자기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미국 신용평가회사들의 주장이다.
한국의 기재부는 다른 선진국 정부에 비해 유별나게 국가채무비율에 집착하고 있다. 2020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국채비율 40%를 넘지 않으려는 기재부 장관을 문재인 대통령은 질책한 바 있다. 기재부가 이처럼 국가채무비율에 집착하는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모순이 있다. 하나는 국가채무비율을 한번 올라가면 결코 내릴 수 없는 지표인 것처럼 세뇌시키는 불순함이다. 독일은 2008년 65.5%까지 개선되던 이 비율을 2008~2009년 발발한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2010년 82.4%까지 높였다가 2018년 다시 61.9%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관리가 왜 불가능한지 의문이다. 20년 넘게 기재부가 연구하고 있는 ‘원화의 국제화’에 왜 아무런 진전이 없는지도 궁금하다. 기재부가 국가채무비율에 집착하는 것은 국민 기만이자 스스로 무능함을 실토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채무비율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맞지 않는다. 일본이 250%가 넘는 국가채무비율에도 불구하고 국가부도가 나지 않는 이유는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채 대부분을 일본우정국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채무비율 120%에도 국가부도를 경험한 이유는 채권단이 국제투자은행들이었기 때문이다. 채무비율 자체보다 채권단의 국적이 중요하다.
민주당은 재난지원금에서 '소득'의 성격을 지워버리면서 자기정체성을 부정함으로써 야당보다 확실하게 오른쪽에 자리 잡게 되었다. 야당이 다시 강령에 포함시킨다는 경제민주화를 민주당은 선거공약에만 포함시켰을 뿐 정권 출범 이후에는 시도조차 못했다. 집권 1년을 넘기면서는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촛불’과 함께 ‘재벌개혁’도 사라졌다. 여당이 야당보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176석을 얻은 자신감을 배경으로 민주당은 21대 국회를 일하는 국회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밤샌다고 무조건 공부 잘하는 것 아니고 열심히 노 젓는다고 배가 항구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 중심’의 철학에 진정성이 실려 있다면 모든 정책을 ‘사람’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정부가 ‘선별’ 기준을 마련하느라 밤새는 동안에도 살아 숨쉬는 ‘사람들’은 매일 먹고 마시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보수 언론의 칭찬에 목말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목말라 아우성치는 ‘사람’에게 물병을 안겨주어야 한다. 통신비 2만원도 통신회사에 지급해서 ‘사람’ 화를 돋우지 마라. 재난지원금이 ‘보편’에서 ‘선별’로 달라지는 것이 단순히 수혜 범위의 축소와 예산 절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중심’의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