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 칼럼] ​교양인이 될 것인가? 속물로만 남을 것인가?

2020-06-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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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동기 오형국 목사가 <매튜 아놀드와 19세기 영국 비국교도의 교양문제>라는 책을 냈다기에, 사서 읽어보았다. 처음 책을 펼쳐들 때에는 ‘목사님께서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과는 큰 관련이 없는 전문적인 신학 서적을 냈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하였었다. 19세기 영국 비국교도의 교양 문제는 지금 이 시기에 우리와는 큰 상관이 없지 않겠냐고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19세기 영국 비국교도의 교양 문제는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 중간계급의 교양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오목사는 책의 부제를 ‘중간계급의 속물성과 자유개념을 중심으로’라고 하였는데, 19세기 영국 비국교도의 속물성이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 중간계급의 속물성과 그대로 빼닮은 것이다. 책을 보니 오목사도 우리나라 중간계급의 속물성을 안타까워하면서 글을 썼음을 알 수 있었다.

비국교도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로마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온 영국 국교회를 거부하는 개신교도를 말한다. 이들은 청교도 혁명을 주도하였으나 크롬웰 사후 왕정으로 복귀되면서 정치에서는 주변부로 몰려난 부류이다. 그런데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릴 만큼 국력이 왕성하던 시대이다. 그리고 비국교도들은 이 시기에 청교도 정신의 근면함으로 경제적으로는 성공하여 영국 사회의 중간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오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편협한 경건과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었으며, 당시의 시대적 변화와 영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성찰능력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 귀족사회는 종래의 특권적 신분이 약화되고, 한편 산업혁명으로 늘어나는 노동자층은 자기들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면서 사회가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회가 빨리 공감대를 찾아야 하는데, 당시 영국은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 자유방임과 국가의 역할 등 세계관적 인식과 사고방식에 심각한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인이자 옥스퍼드대 교수인 매튜 아놀드는 당시 이러한 분열과 혼란이 거의 정신적 무정부 상태에 달했다고 보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고심을 하였다. 아놀드는 이를 중간계급인 비국교도들의 교양 함양에서 찾았다. 인문교양은 그 자체로서는 역사변혁의 역동성을 방출하지 못하지만, 종교의 지적 ∙ 문화적 차원을 순화시킴으로서 도덕과 사상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아놀드는 이렇게 하여 열정적인 중간계급의 종교적 기질과 사고방식이 개혁된다면 이들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오목사는 당시 영국 비국교도들의 열정적이지만 반지성주의적인 신앙 형태는 “열은 나지만 빛은 없다”는 야유를 받을 만큼 사회적 역기능을 낳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럼 오늘의 우리나라 개신교는 어떨까?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교회는 연륜이 쌓이면 거룩한 지혜로 성숙하리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오히려 더욱 아놀드의 필리스티니즘(Philistinism, 속물성)이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다. 과거에는 나이브한 반지성주의였다면 이제는 몽매주의(Obscurantism)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가 정치세력과 거짓 신비주의에 휘둘리며 시민사회를 어지럽히는 오늘의 모습이다.” 오목사의 진단이다. 그렇다! 오늘날 한국의 일부 개신교도들은 ‘예수님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라는 역사적 성찰은 전혀 없이 오로지 근본주의 신앙, 축복 우선의 신앙에 사로잡혀있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정치세력에 휘둘려 성조기와 심지어는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거리에 나와 탄핵 원천무효를 외친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성서를 전체적 맥락으로 보지 못하고 기계적으로만 해석하여 12지파의 144,000명만이 구원받는다는 신천지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늘어나 코로나 19의 진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국의 개신교 모습은 한국의 중간계급의 모습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혜택을 본 이들은 산업화의 향수에만 사로잡혀 산업화 이후의 노동의 문제, 소수자의 문제 등 한국의 사회적 모순에는 무감각하다. 그리하여 아놀드가 영국의 중간계급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주요한 국가적 문제들에서 사사건건 심각한 지적,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개인적 욕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며 경건한 삶을 사는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사회 전체로 눈을 돌림에 있어서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가치만이 최고라며 다른 가치는 도대체 돌아보지도 않으려고 한다. 이들의 이런 경직된 사고를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 아놀드는 교양(culture)이란 사물을 편견이나 파당적 치우침 없이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성적 능력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의 생각과 다른 주장을 접하더라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교양인은 자기와 다른 주장에도 혹시 받아들일 점은 없는지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혹시 수정할 점은 없는지 등으로 유연한 사고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목사의 말처럼 한국의 중간계급에게는 이러한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교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보수적 가치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이번 2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럴 때 사고가 열린 교양인이라면 “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 그들의 주장에 경청할만한 것이 있는가? 혹시 내 생각이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하는 열린 사고를 할 것이다. 이에 반해 사고가 경직된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다면서, 이런 결과가 나온 데에는 틀림없이 뭔가 부정이 개입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개표 조작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심리가 이러하리라.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이 오가는 세상, 변화의 흐름이 예전보다 빨라진 세상에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이 절대적이라는 속물성만 넘친다면 그 사회는 불행해진다. 당신은 속물로만 남을 것인가, 아니면 아놀드나 오목사의 충언(忠言)에 귀 기울여 세상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교양인이 될 것인가?
 

[사진=양승국 변호사, 법무법인 로고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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