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수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올해 GS그룹 제 2대 회장에 공식 취임한 허태수 회장은 평소에도 ‘디지털 경영’을 입버릇처럼 강조해왔다. 코로나19 위기 등 그 어느 해보다 불확실한 경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올해 허 회장이 제시한 청사진 역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 Digital Transformation)’이다.
허 회장이 DX를 강조하는 것은 일찌감치 미국에서 쌓은 글로벌 경험과 IMF 위기를 거치면서 ‘변화의 중요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고려대 법대 졸업 후 미국 조지워싱턴대 MBA를 거친 허 회장은 美 컨티넨탈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해 영국, 일본 등에서 근무했다. 귀국 후에는 LG투자증권 M&A팀장, IB사업본부장 등을 거쳤다.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국내 공기업과 중견기업의 주식연계채권을 해외시장에서 발행, 달러를 조달했다. 한 푼의 달러가 귀하던 시절, 우리나라 기업의 가치를 해외 투자자에게 세일즈하면서 국가적 위기극복에 힘을 보탠 것이다.
2002년에는 GS홈쇼핑(GS숍)으로 자리를 옮겨 5년 동안 전략기획부문장, 경영지원본부장 등을 거치며 현장 경험을 착실히 쌓았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21년 만인 2007년 허 회장은 GS홈쇼핑 대표이사직에 올랐다. 회사 관계자는 “재직 당시 회사 점퍼를 입고 출퇴근하고 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허 대표님을 잘 몰라보던 직원들도 많았다”면서 “차근차근 현장을 배우고 살피면서 안목을 키워온 소탈한 경영자”라고 기억한다.
그가 대표이사가 된 시기는 홈쇼핑산업의 성장 정체기였다. 경쟁사는 늘어나면서 ‘저가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이 시기 GS홈쇼핑은 트렌드 리더 홈쇼핑을 표방하며 패션을 중심으로 상품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자칫 가격경쟁에 매몰될 뻔했던 업계를 퀄리티 경쟁으로 이끈 것이다. 그 결과 홈쇼핑산업은 매년 급성장·재도약하게 된다. GS홈쇼핑의 실적도 승승장구했다. 허 회장 취임 직전 GS홈쇼핑의 연간 취급액은 1조8946억원, 당기순익은 512억원이었으나 2018년엔 취급액 4조2480억원, 당기순익 1206억원을 기록하며 4배 가까이 성장했다.
특히 허 회장은 홈쇼핑이 내수산업이라는 통념을 깬다. 글로벌 미디어 기업과 손잡고 해외 홈쇼핑 사업을 벌이는 한편 국내 기업의 해외 판로 개척 등 중소기업의 수출 지원에 주력했다. 그 공로로 유통기업 최초로 무역의 날 수출탑도 수상했다.
허 회장의 변화를 두려워 않는 승부사적 기질은 홈쇼핑 산업을 모바일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빛을 발한다. 2010년도 GS홈쇼핑이 보유한 케이블SO인 GS강남방송과 GS울산방송을 전격 매각한 것이 대표적이다. 케이블 플랫폼에 의존하던 업계는 ‘채널=매출’이란 통념을 깬 허 회장의 행보에 놀라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허 회장은 이때 마련한 자금을 토대로 모바일 홈쇼핑에 투자를 감행했다. 결국 GS홈쇼핑은 모바일 고객이 가장 많은 홈쇼핑사로서 확장성을 키운 동시에 ‘업계 1위’ 입지를 탄탄히 다지게 된다.
◆그룹의 ‘글로벌 센서’ 역할 톡톡...스타트업에도 과감한 투자
허 회장은 GS그룹의 ‘글로벌 센서(Sensor)’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다년 간 외국에서 근무한 경험과 홈쇼핑 해외사업을 주도하면서 글로벌 마켓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이해한 그는 일찍이 美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소를 운영한 데 이어 현지 자회사 GSL Labs( Global Sensing & Learning Labs)를 설립했다.
GSL Labs는 이름 그대로 혁신의 중심지인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기술과 비즈니스의 변화를 감지해 서울로 전달하는 역할과 직원들의 혁신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GS홈쇼핑 직원들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연수를 받았고, 이제는 GS그룹의 여러 계열사들의 연수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디자인 싱킹, 스크럼 등 실리콘밸리 혁신 기업의 업무방식을 GS홈쇼핑에 가장 먼저 적용, GS그룹 전체로 확산한 역할을 허 회장이 주도한 것이다.
허 회장은 “기업을 하나의 생물체라고 본다면 기업경영이란 외부 생태계의 변화를 빠르게 인식하고 대응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해왔다.
이 같은 그의 기업경영 철학은 평소 트렌드 변화를 센싱하는 그의 습관에서 드러난다. 국내외 비즈니스 신간, 신문 잡지를 꼼꼼하게 읽고 관련 임직원에게 공유해주는가 하면 궁금한 사항이 생기면 반드시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거나 직접 찾아가 묻는다. 허 회장은 영업 실적 보고를 받을 때도 해당 실적이 소비자와 협력사, 경쟁 관점에서 어떠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지 집중하고, 반드시 현장을 통해 확인한다.
허 회장이 최근 스타트업 투자에 적극적인 것도 ‘빠른 변화’를 위함이다. 대형 함선이 방향 전환을 빠르게 할 수 없듯, 전통적 대기업 모델이 변화를 읽고 적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
때문에 대기업보다 유연한 스타트업과 협력을 하면 신기술과 비즈니스 환경 변화를 빠르게 읽고 대응할 수 있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필요하다. 시장을 독식하는 전통적 대기업의 모델은 위험하며, 스타트업을 포함한 다양한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협력관계를 구축해 건강한 영향력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게 허 회장의 생각이다. 이는 기업뿐 아니라 우리 사회와 인류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높이는 길이라고 본다.
허 회장이 강조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은 전임 허창수 명예회장이 주창했던 ‘Grow with us’ 경영철학을 계승하는 한편, 온화하고 협력을 중시하는 GS 기업문화와 어우러져 GS그룹의 새로운 경영방침으로 자리잡고 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으로 ‘뉴GS’ 신사업 현실화
허 회장은 고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이 문제를 잘 정의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데이터와 디지털 기술을 잘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GS홈쇼핑의 회사 비전을 새롭게 하고 직원들이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경험하면서 많은 변화를 끌어낸 경험을 살려 GS그룹 전반에 확산시켜왔다.
허 회장은 특히 디지털 신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AI)과 블록체인(Blockchain) 기술이 가져올 미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또 클라우드와 SaaS 등 IT 기술의 최신 경향을 GS그룹 전반에 전파하기도 했다.
허 회장은 지난 1월 2일 서울 강남구 논현로 GS타워 사옥에서 계열사 CEO를 비롯한 경영진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2020년 GS 신년모임’에서도 이를 강조했다. 이날 모임은 회장 취임 후 첫 공식 행사였지만, 격의없이 소통하고 협업문화를 강조하는 허 회장의 오픈 이노베이션 철학을 바탕으로 스탠딩 토크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는 이 자리에서 “디지털 역량과 글로벌 역량을 갖춘 인재를 많이 확보하고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IT와 데이터를 결합하여 우리의 사업구조를 고도화 시키는 ‘디지털 트랜스포이션’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하는 한편“중장기적으로 우리가 보유한 핵심 기술에 ‘디지털 역량’을 접목하고, 우리의 코어 사업과 연관된 사업으로 신사업을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의 기존 역량에 더해 새로운 역량을 확보하고 기존 사업을 진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새로운 사업들을 찾아 키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런 당부를 실현하기 위해 GS칼텍스, GS에너지, GS건설, GS홈쇼핑, GS리테일 등 GS그룹 계열사별로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에 진출, 비즈니스 기회 확대를 위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