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영국보다 무려 300년이나 빠르다. 산업화가 늦어서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돼 나올 것이다.”
1971년 고(故) 아산 정주영 현대중공업 명예회장은 영국 선박 컨설턴트 회사인 애플도어사의 롱바톰(Longbattom)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갑에서 꺼낸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한화 지폐 한장으로 4300만 달러의 차관을 부탁한 것이다.
당시 울산을 조선소 부지로 확정했던 정 명예회장은 막상 조선소를 지을 자금이 없었다. 영국 최고의 은행인 버클레이은행을 찾아가 차관을 요청했지만 이내 거절당한다. 은행 측은 현대의 조선능력과 기술수준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정 명예회장은 한번 더 큰 난관에 부딪힌다. 차관에 대한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최종승인을 받으려면, 선박을 구매할 사람에 대한 확실한 증명을 갖고 와야만 했다. 정 명예회장은 즉각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나섰다. 그에겐 조선소 부지인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 한장과 지도, 26만t 유조선 도면뿐이었다. 당연히 선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있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배를 만든다니 황당한 일이었다.
그러다 또 한번 롱바톰 회장의 도움으로 그리스 선 엔터프라이즈사의 리바노스(George S. Livanos)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정 명예회장은 리바노스 회장이 머물던 스위스 몽블랑의 한 별장으로 날아갔고, 계약은 그 자리에서 맺어졌다. 리바노스 회장은 정 명예회장의 개척정신과 의지에 감탄, 대형 유조선 2척을 주저없이 발주한 것이다.
선박 수주에 성공하면서 현대중공업은 영국 ECGD의 승인을 받았고, 1972년 3월 23일 국내 최초의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 건설의 닻을 올리게 된다. 당시 기공식에서 정 명예회장은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 공기 내 최소의 비용으로 최첨단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한다.
이후 2년 뒤인 1974년 6월 28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식 겸 1·2호선 명명식이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개최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현장에서 ‘造船立國(조선입국)’이라는 휘호를 썼고, 이는 돌에 새겨져 지금도 울산 현대중공업 본관 앞에 세워져 있다.
성공적으로 세계 조선업 무대에 데뷔했지만 이내 위기가 찾아온다. 1973년과 1978년 1, 2차 오일쇼크로 인해 세계 해운·조선 경기는 급격히 냉각됐고, 국내 조선업계는 원가에도 못미치는 가격으로 수주하며 불황에 봉착한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혁신에 나선다. 대형선(VLCC, 초대형 유조선) 위주에서 다목적 화물선, 벌크선, 목재운반선 등 중소형까지로 선종을 확대하고 다변화시킨다. 특히 1975년 수리조선소인 현대미포조선을 설립한다. 1976년에는 엔진기계사업본부를 발족하는 등 과감한 신규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1978년 정 명예회장의 여섯째 아들인 정몽준 전 회장이 미국 MIT대 경영학 석사를 받고 귀국, 2세 경영이 시작된다. 1987년 회장에 오른 정 전 회장의 경영참여 기간은 짧지만 그가 사장이던 1983년 현대중공업은 210만총t(G/T)규모 선박을 수주, 전 세계 발주량 중 10.7%를 차지한다. 그해 일본 경제주간지(다이아몬드지)는 조선 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현대중공업을 선정, 마침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게 된다. 조선소 기공식 후 11년, 선박건조 시업식 후 10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다.
1988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한 현대중공업은 30년 넘게 정주영 명예회장의 ‘위기 극복 DNA’를 바탕으로 혁신을 거듭, 세계 1위 조선사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위기가 기회다’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