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을 말하려면 私利정치는 버리시오

2020-06-0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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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녀가 독립군 채덕승장군의 목소리로 되짚는 봉오동전투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연합뉴스]

 
 

[김세원의 천방지축] 1898년 함경북도 경원생 채덕승(蔡德勝), 나는 대한의 독립군이었소. 국권 상실의 치욕을 당한 암울한 시대, 식민지 조국에서 일제의 노예로 살 수는 없었소. 두만강을 경계로 경원과 마주보고 있는 만주땅 훈춘으로 건너갔소. 베이징 유학시절 익힌 중국어 덕분에 낮에는 만주땅 훈춘의 중국군대에서 근무하고 밤이면 동지들과 모여 일제를 무너뜨릴 방도를 궁리했소.

1919년의 3·1운동은 국경 너머 만주와 노령(露領)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의 애국심에 불을 질렀소. ‘훈춘 호랑이’로 불리던 고향 선배 황병길·최경천 선생 등과 함께 3월 20일 3·1 독립선언 축하민중대회를 개최했소. 조선인들이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수천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훈춘 시내를 행진하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다오. 그해 4월 훈춘에서 나정화, 최경천, 오종범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여 단원 60명을 모집했소.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한인사회당 당수 이동휘 장군과 협의하여 포수단원들을 우수리스크로 이동시켜 훈련을 하고 8월 훈춘으로 돌아왔소.
#대한독립군 헌병사령관이 되다

황병길 선배가 결성한 무장독립운동단체 급진단에도 참여했는데, 다음해 4월 포수단·급진단·의사단이 훈춘대한국민회 군무부로 통합되면서 대대군사경찰대장이 되어 독립군 모집, 무기 징발, 군자금 모집 등을 담당하였지요. 그런데 곳곳에서 독립운동단체가 생겨나고 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이 모이자 기강이 해이해지고 자신의 영달과 제 식구들의 안녕을 위해 일제에 빌붙는 변절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소. 독립군의 군규(軍規) 엄수 여부를 감독할 조직이 필요했소. 1920년 6월 22일, 군무부의 취체와 군사(軍事)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헌병대를 신설하고 헌병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병사 중 100명을 선발하여 헌병을 양성하는 데 진력하였소.

1920년 10월 9일 훈춘현 우두산에서 일본군 1개 중대와 교전을 벌였고 11월 4일에는 삼도구에서 일본군 19사단 38여단 78연대의 우에사카 소좌가 이끄는 2개 중대와 교전을 벌이다 나정화 참모장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오. 1921년 2월부터는 최경천·윤낙세·한경서 등과 함께 120여명의 무장독립군을 거느리고 선전문을 배포하고 일제 밀정을 색출해 처단하는 일을 하였소. 내 재판기록과 내가 관련된 사건을 다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사에 ‘성정이 포악하고 잔인하다’ 고 돼 있는 건 내 임무가 밀정을 처단하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오.

1921년 5월 크라스키노로 피신했다가 토문자 북쪽에서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국자가로 압송되었소. 소요죄로 금고 1년형을 받았으나 친분이 있었던 중국인들의 협조로 3개월 만에 석방되었소. 1922년 말 무렵부터는 훈춘에 배속됐던 중국 육군 제29단 제3역의 통역 겸 헌병대장으로 일하면서 군자금 모금, 일제관공서 폭파, 밀정 처단 활동을 계속했소. 중국 군인으로 위장했기에 비교적 오래 신분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지만 결국 ‘모일 모시 모처에서 독립군 동지 2명이 기다린다’는 한국인 변절자의 거짓말에 속아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소. 1925년 8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5년형을 받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됐소.

#독립군 가족들의 비참한 삶

종일 볕이 들지 않는 감방에 갇혀 있다가 수시로 끌려나가 고문을 당하고 겨울이면 언 밥을 녹여 먹어야 했지만 하루 세 끼 밥이 나오니 나 혼자만 호의호식하는 것 같아 가족들에게 미안했소. 독립군 남편을 둔 죄로 동갑내기 아내는 수시로 경찰서에 끌려가 남편이 있는 곳을 대라고 고문을 당하고 나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오. 내 아내 박혜숙은 열네 살 때 집안 돼지우리에 침입한 호랑이를 관솔 횃불로 내쫓고 일제 고등계 형사와 사내들의 숱한 유혹을 단칼에 뿌리칠 정도로 담력과 배포가 컸던 여장부였다오. 아내가 함흥, 경원, 훈춘, 도문을 오가며 옥바라지를 하느라 어린 남매는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다오. 일경의 눈을 피해 몇 달에 한 번, 한밤중에 월담을 하여 가족을 잠깐 만나보고 떠날 때마다 아이들 얼굴이 눈에 밟혔소.

#봉오동 전투의 대승 배경-항일무장단체들의 연합작전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에서 숨을 거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하겠다는 계획을 3·1절 기념사를 통해 밝혔기에 봉오동 전투 얘기를 하려 하오. 일제가 1920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만주·노령의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자 독자적 활동을 벌이던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들이 집결에 나섰소. 홍범도(1868~1943)가 이끄는 대한의군단, 안무(1883~1924)가 이끄는 간도국민회군, 최진동(?~1945)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와 본인이 소속된 훈춘대한국민회 군무부가 연합하여 북하마탕에서 군무독군부를 결성했고 여기에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이 합류하여 1920년 5월 28일 만주 봉오동에서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소. 

일주일 뒤인 6월 4일 연합 작전이 개시됐소.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헌병 순찰소대를 습격해 격파했소. 예상대로 다음 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추격해오자, 독립군사령부는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 1개 소대 병력을 매복시킨 뒤, 일본군을 그리로 유도하였소. 6월 6일 오전 10시 일본군이 삼둔자까지 추격해 왔을 때,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군 60여명을 사살했소.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제19사단의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郎) 소좌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켜 두만강을 건넜소.

두만강에서 40리 떨어진 봉오동은 고려령(高麗嶺)의 험준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진 계곡지대로 100여 호의 민가가 상촌·중촌·남촌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는데, 상촌에는 군무도독부의 본영이 있었다오. 독립군사령부는 홍범도와 최진동, 안무의 연합부대를 재편해 제1중대는 만주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쪽 고지, 제3중대는 북쪽 고지, 제4중대는 서산 남단 밀림 속에 매복시켰소. 6월 7일 낮 마침내 일본군 주력부대가 ‘백두산 포수’ 홍범도 장군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봉오동 상촌을 지나 포위망 가운데 들어서자 삼면에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소.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30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함경북도 온성으로 패주하였소. 반면 아군은 장교 1명, 병졸 3명이 전사했을 뿐이었소. 독립군과 일본정규군 간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던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지휘관의 영도력,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 작전계획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무엇보다도 각개약진하던 항일무장단체들이 소영웅주의를 버리고 힘을 합쳐 싸웠기 때문이오.

#20세기 초 독립운동가가 21세기 초 시민운동가에게

1929년 4월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활동하다가 1930년 10월 20일 소만(蘇滿) 국경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소. 숨이 끊어지는 순간, 아내 태중의 막내딸이 정말 보고 싶었소. 막내딸은 내가 죽고 두 달 뒤에 태어났다오. 소만 국경지대의 어느 벌판 구석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든 지 90년 만에 이승에 나와 보니 세상이 많이 변했구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우뚝선 조국의 발전상을 보니 우리가 만주벌판에 흘린 피와 땀이 헛되지 않았나 보오. 2020년 올해가 항일무장투쟁 100주년이라고 하여 독립군을 기리는 각종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는 것도 뿌듯하오. 그런데 오로지 조국 광복과 독립을 위해 자신은 물론, 가족의 삶까지 내팽개쳐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이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친일, 반일 편가르기의 잣대로 폄훼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소.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회계부정이나 가족의 편의 봐주기 같은 ‘작은’ 범법행위는 얼마든지 저질러도 된다고 여기는 괴이한 논리가 횡행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오. 스스로를 독립운동가의 후예라고 여기는 이땅의 시민운동가들과 시민운동가 출신의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소. 당신들은 당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느냐고. <건국대 초빙교수>

<편집자주: 채덕승 장군의 외손녀인 필자가 대한독립운동사, 민족문화대백과, 일제강점기 재판기록,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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