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꺾인 문곡성(文曲星)
열 달 전, 그날따라 일찍 퇴청해 잠자리에 든 홍문관 교리 김응균은 기이한 꿈을 꿨다. 청명한 밤하늘에서 반짝이던 문곡성(文曲星)이 자신의 품으로 떨어져 안기는 게 아닌가.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로, 예로부터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성좌로 받들어졌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간밤의 꿈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내 나이가 벌써 마흔다섯이다.
김응균은 순조(純祖, 1800~1834)․헌종(憲宗, 1834~1849)․철종(哲宗, 1849~1863), 세 임금 재위 60년 동안 세도정치를 펼친, 바로 그 안동 김씨다. 권세야 문정공(文正公)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집안 것이었으나, 적통(嫡統)으로 따진다면 그의 집안도 꿀릴 게 없었다. 김응균의 10대 할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문충공(文忠公)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김상용은 김상헌의 백씨(伯氏)이므로, 실은 이쪽이 큰집이다.
조선에서는 양반이라고 다 같은 양반이 아니었다. 4대(代) 안에 청요직(淸要職)을 지낸 조상이 없으면, 행세하기도 힘들었다. 청요직이란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나 이조(吏曹)의 관직을 일컫는 말로, 정승판서로 올라가는 등용문이었다. 이조참판을 지낸 9대조 김광현(金光炫) 이후, 청요직을 제수받은 이는 김응균이 처음이었다. 그는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싶었다.
# 신동(神童)
아기의 어머니 함안 박씨는 부실(副室)이었다. 국법은 적서(嫡庶)를 엄격하게 나누고, 차별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의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실화다. <홍길동전>으로부터 200년, 그 사이에 완고하기 짝이 없던 조선의 신분제도도 서서히 느슨해졌다. 국초(國初)에는 5%도 안 되던 양반의 인구 비중이 지역에 따라서는 30%를 넘어섰지만, 적서의 구분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도 아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끔은 됐나 보다. 홍문관의 동료들 역시 늦둥이 아들을 얻었으니, 한턱내라며 실없이 재촉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 남자들의 아들 사랑은 유별나다. 거나하게 한 순배가 돌고 나자, 옥당(玉堂)의 문사(文士)들이 모인 참에 아기 이름을 지어주잔다. 항렬은 누를 진(鎭) 자(字). 첫째가 길 영(永) 자를 쓰니, 둘째는 아름다울 가(嘉) 자가 어울리겠다는 제안이 나왔다. 이리하여 아기는 가진(嘉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가(永嘉)는 안동 김씨들의 본향(本鄕) 안동의 옛이름이다.
아버지는 퇴청만 하면 늦둥이 둘째를 찾았다. 걸음마를 떼고 제법 말문이 트이자, 글자를 보여주었더니 그걸 잊지 않고 다른 책에서 그 글자를 짚어낸다. 이놈 봐라? <천자문> 맨 앞의 하늘 천(天) 자를 가르쳐주자, 이번에는 하늘을 가리키며 천(天)이라고 작은 입을 놀린다. 일가친척들은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발했다. 이 아이는 신동이다! 과연 문곡성.
아버지는 다섯 살 가진이를 아랫마을 장동(壯洞)의 서당에 보냈다. 가숙(家塾)이다. 한양에서 벼슬하던 문정공(文正公)의 직계 후손들은 대대로 장동에 모여 살았는데, 명문거족답게 가문의 자제들만 따로 모아 가르쳤다. 조선은 보통교육에 투자하지 않았다. 이태 뒤, 가진은 천자문을 뗐다. 또래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발군(拔群)의 성취였다.
# 가문의 본향(本鄕), 안동으로
하나를 가르치면 둘 셋을 깨우치는 아들. 김응균은 나중 일에 대한 염려는 일단 제쳐놓고, 가르칠 수 있는 데까지 가르쳐보자고 마음먹었다. 가진이 여섯 살이 되던 해(1851), 그는 성균관의 최고직인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홍문관보다는 긴장이 덜한 자리라, 아들과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다. 동농의 첫 번째 스승은 부친이었다.
글공부와 함께, 글씨 쓰는 법도 가르쳤다. 선비의 품격을 평가하는 일차 잣대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던 시절, 서도(書道)는 글(漢文)을 배울 기회를 얻은 모든 양반 자제들이 얻으려는 바였다. 영자필법(永字筆法)부터 시작했다. 시필서영(始筆書永)이라고, 영(永) 자부터 쓰게 함으로써 모든 글자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여덟 가지 필법을 익히도록 한다. 요즘도 서예원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집안 내력인지, 자질이 남달랐는지, 가진의 솜씨는 금세 늘었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놀랐다. 자식 가르치는 재미가 그리 쏠쏠할 수가 없다. 배우는 쪽의 지성(至誠)과 가르치는 쪽의 열성(熱誠)이 막상막하, 마치 부자가 함께 내달리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아버지가 안동부사가 되어 곧 임지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한창 신나게 배우던 꼬마는 풀이 죽었다.
“왜 얼굴이 부었느냐?”
“안동으로 가신다면서요? 그럼 저는 누구에게 배워요? 아버지 따라가면 안 돼요?”
“오냐. 너뿐 아니라 네 어미도 데려가마.”
가진은 뛸 듯이 기뻐하며 먼저 출발한 부친을 좇아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다. 아마도 그의 첫 여정이었을 안동길. 그의 마지막 여행 첫 기착지가 하필이면 같은 자를 쓰는 안동(현재는 단둥)이었던 건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무려나, 그때 처음 안동 땅을 밟고 나서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동농이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가 되어 금의환향하게 될 것을, 아버지와 아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너는 과거를 보지 못한다.”
안동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평소 몸이 약했고, 그것이 가진 형제의 근심거리였다. 어머니는 당신의 고향이기도 한 안동에 부군을 따라 내려왔다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었다. 삼우(三虞)와 졸곡(卒哭)을 모두 마치자, 아버지는 가진과 형 영진을 불렀다. 한양으로 올라가 학업에 정진하라는 말씀이었다. 형제는 엎드려 절하고 행장을 꾸렸다.
가숙의 훈장 선생님부터 찾아뵈었다. 가진의 진도는 <천자문>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같은 초아문(初兒文,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유학의 기초서적)을 덮는 단계까지 나아가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서(四書), 즉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의 세계로 들어간다. 시문(詩文) 또한 필수였다.
코흘리개 신동이 나이를 먹으면서 범재(凡才)로 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으나, 가진의 기세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약관(弱冠)이 되기도 전에 유가의 소양을 고루 갖춘 대재(大才)의 싹이 드러났다. 시회(詩會)에도 열심히 참석해 실력을 겨뤘다. 가진은 자신의 과거 급제를 꿈에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863년 가을, 모처럼 형제를 불러 겸상으로 저녁을 들고, 아버지 시임(時任) 형조판서 김응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 오늘 모인 김에 너희들에게 알려 줄 것이 있다. 가진이, 너는 작년부터 과거를 보겠다고 하였는데, 오늘이사 말한다마는 너는 과거를 보지 못한다. (…) 국법이 그러하니 어쩔 도리가 없구나.”(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학민사, p72)
동농 김가진 18세. 청운의 꿈은 스러지고,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