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정유년(丁酉年)이 밝자 미술관, 박물관 등에서 '닭'을 주제로 한 전시·축제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닭이 나온 그림은 물론이고 닭을 글로 표현한 작품, 판화로 찍어낸 닭 등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서공임(57) 작가의 민화는 그래서 더 눈길을 끈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다 엇비슷한 닭 그림들이지만, 서 작가의 작품은 정밀한 묘사, 맑고 투명한 색 등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는 양배추즙을 늘 갖고 다녀야 할 정도로 위장병에 시달리지만, 왕성한 창작활동을 멈춘 적이 없으며 민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제자 양성에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개인전 23회를 비롯해 이탈리아·스페인·독일·헝가리·중국·폴란드·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우리 민화를 소개해 온 그는 현재 연세대 미래교육원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롯데갤러리 영등포점에 이어 안양점에서 '새 날을 밝히는 새 그림'전(3월 5일까지)을 열고 있는 그를 새해 기운 가득한 갤러리에서 만났다.
◆ 울긋불긋한 민화에 이끌려…"인사동은 행운 그 자체"
서 작가가 그림 작업에 집요할 정도로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대가들의 차마 숨길 수 없는 '천재성'이. 서 작가는 "어렸을 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림을 직업으로 하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흔히들 천재적인 재능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인내와 노력으로 그림을 그려 왔다. 무지하리 만큼 참을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여서, 초등학생 때 신문 채집, 그림 숙제 등을 곧잘 했었다. 내 것뿐만이 아니라 동생, 이웃들 것까지 내가 도맡았다"고 소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집이 조그만 복숭아 과수원을 했었는데, 동네 이름이 '화동골'일 정도로 봄이면 복숭아꽃이 여기저기 만개했다"며 "자연을 접하며 자랐던 게 미술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주 요인이었던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복 2시간이 걸리는 통학길에 그가 만났던 것은 드넓은 평야와 물 맑은 연못, 푸른 보리밭과 다채로운 빛깔의 들꽃 등이었고 비가 오면 연못의 연 잎을 뜯어 우산 대신 쓰고 다녔다. 미술가를 길러내는 토양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는 전북 김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생 때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 왔다. 아껴 모은 돈으로 덕수궁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 가 스케치를 하는 등 미술가의 꿈을 본격적으로 꾼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서 작가는 대학을 가지 못 했다. 아니, 갈 수 없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이 가정 형편 등을 이유로 그에게 진학 대신 취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못내 아쉬웠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며 미술 중에서도 특히 민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로 화제를 옮겼다.
그는 "물감 재료를 사러 화방에 갔는데 한 화실의 '수강생 모집' 공고를 봤다. 거기는 민화, 불화 등을 상업적 판매를 목적으로 그리는 곳이었는데 도제교육을 하고 있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화실에서 청소, 커피 타기 등 잡일을 참 많이 했다"면서도 "울긋불긋한 느낌의 민화가 참 매력적이었다"고 웃었다.
그는 민화의 길을 어떻게 걸어왔을까. 어림짐작으로라도 민화가 '꽃길'이 아님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성남에 있던 화실에서 7년간 도제교육을 받았는데, 입문 1년 만에 인사동으로 옮겨갔다. 이게 내게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분위기가 다소 달라졌지만, 당시의 인사동은 고즈넉하면서도 예술인과 예술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핫 플레이스'였다. 그는 "나전칠기, 골동품 등을 둘러보는 즐거움도 있었고, 퇴근길 헌책방에서 민화 관련 책들을 들춰보는 기쁨도 누렸다"며 "인사동의 분위기 자체가 내 꿈을 북돋워준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집에 와서 그림 연습을 매일 1~2시간 정도 꼭 했던 것도 인사동의 힘이었으리라.
◆ 10년 준비한 첫 개인전 '완판'…스페인 국왕 부부도 반해
서 작가는 1986년 드디어 자신만의 작업실 '서공임 민화연구실'을 차렸다.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였다. 붓 몇 자루, 책 몇 권만 갖고 시작한 젊은 작가의 작품을 눈여겨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는데, 작품을 팔아야 '연명'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도움은 절실했다.
그는 "젊은 민화작가의 작품을 누가 사주겠느냐"며 "나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서 300퍼센트 노력을 해도 100퍼센트를 채 얻기 어려웠는데, 다행히 당시 인사동 관계자들의 소개, 지인들의 입소문 등은 고객을 모으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종로경찰서 보안과 소속의 한 경찰관이 자신을 민중미술가로 생각해 화실을 찾아 왔다가 작품들을 보고 오해를 풀었던 것도 어려웠던 시절의 '웃픈' 에피소드다. 그 경찰관은 서 작가의 작업실이 효자동으로 이사간 뒤에도 몇 십 년 동안 찾아왔다고 한다.
서 작가는 1996년 백상기념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준비하고 또 준비해 마련한 전시회였다. 그는 "건설경기가 좋을 때는 그림이 잘 팔렸다. 인사동 다방에 들어가면 전국적인 그림 유통상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며 "그땐 주문 날짜에 맞추느라 이틀에 한 번 밤을 새우며 그린 적도 있다. 살갗이 닳아 피가 나도 모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부모님을 모시며 생계를 해결하느라 미대에 진학할 수 없던 그에게 미술계 사람들은 "어디 나왔어요?", "민화? 아, 베끼는 그림 하시는구나" 등의 비수를 꽂았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용기를 냈고, 그 첫 번째 결과가 어렵사리 성사된 개인전이었다. 그는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를 볼 때마다 '그림 그리는 장사꾼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 나도 성장하고 싶다. 전시장에 내 그림을 걸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며 "아마 대규모 민화 전시를 한 작가는 내가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뿌듯해 했다.
첫 개인전의 결과는 어땠을까. 그는 "유명 광고회사에 카탈로그를 의뢰·제작한 뒤 언론사들을 돌아다니며 전시 소개를 부탁했다"며 "다행히 그림은 모두 팔렸다"고 환하게 웃었다. 전시회 첫날 아침 검은색 세단에서 내린 남자가 전시장에 들어와 '호텔에서 필요하다'며 병풍 몇 점을 바로 구매한 일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란다.
개인전 이후 스페인 국왕 부부가 그를 찾아온 것도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전시가 끝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스페인 국왕 부부가 나를 만나러 인사동에 왔다. 원래 내 작업실을 방문한다고 했지만, 너무 허름해서였는지 근처의 전통음식점에서 만났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내 작품을 들고 가서 그들에게 보여주고 작은 호랑이 그림을 선물했는데, 이게 계기가 돼 해마다 전시를 이어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 "그림엔 '생명력' 있어야…사회에 보탬 되는 일 하고파"
서 작가는 닭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닭띠인 어머니의 영향도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닭 잡는 것을 자주 보기도 했고, 닭 깃털로 놀기도 하는 등 닭과 친하게 지냈다"며 "다산, 회개, 부귀공명 등 여러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닭을 그리면서 나 자신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이번 전시를 한창 준비하던 작년 돌아가셨다. 그는 "평생을 함께한 어머니가 가시지 않았다면 이 전시를 보셨을 것이기에, 이번 전시는 당신께 선물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그림에 반영된 신계, 봉황 등의 상징성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사랑과 맥이 닿는 듯하다.
그는 작업을 할 때 그림에서 에너지가 나왔으면 하는 생각으로 붓을 잡는다.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생명력'이다. 그는 "그림을 그린 지 30년이 돼서야 깨달은 것은, 자유로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늘 섬세함을 추구했는데, 누군가는 그걸 '인쇄'라고 깎아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 인왕산을 산책하는데, 그곳에서 만난 무명화가들을 위해 몇 년 전 헌정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그분들을 보며 꾸미지 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깨달았다"며 "꾸밈을 버렸더니 내 마음도 편해지고 자유로움이 찾아왔다. 그게 바로 그림의 생명력"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민화전은 한국에서 2년 만에 열리는 것으로, 특히 닭을 주제로 한 전시는 12년 만에 관람객들을 만나는 셈이다. 그는 "현대인에 맞게 제작·기획된 닭 그림 42점뿐만이 아니라, 민화로 제작된 아트상품, 도자기, 컬러링북 등도 함께 선보인다"며 "전통적 민화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강렬한 전통 색감을 바탕으로 나만의 창조적인 재해석을 가미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민화를 그린다는 것의 의미를 뭇사람들은 쉬이 알기 어렵다. 서 작가는 "험난한 길"이라고 못박은 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작 우리 것은 홀대하면서 서양 것은 무조건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한류를 이끄는 케이팝도 그냥 알려지 건 아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노력하는 분들의 노력이 있어서 뜬 것일 테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화도 힘들고 어렵지만 지켜나가야 할 분야"라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오는 15일부터 이탈리아 로마에서 전시와 워크숍을 진행하고 3월엔 피렌체로 옮겨 전시를 이어갈 예정이다. 그가 현지에 선보일 것은 한국의 세시풍속을 주제로 한 닭 그림과 세화 등이다. 몸을 추스려야 하지만 설레기도 하다는 그는 "건강하게 지내면서 민화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2년 전부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특별한 하루' 1일 명예교사로도 활동을 하고 있는데, 다문화 가정이나 북한 이탈주민, 지방 문화소외 지역 등에 자주 찾아가 그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닭은 지난해 국정농단 사태 등으로 본의 아니게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는 "영험한 닭이 어쩌다 그렇게 인식됐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닭의 '신의'에 주목해 올해는 서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공임의 '팔 할'은 과거에 매이지 않는 예술적 단호함과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진취적 성격이다. 마냥 그림이 좋았던 시골 소녀가 한국을 대표하는 민화작가가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