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1972년 가톨릭에 귀의(歸依)했다. 불교도(佛敎徒)에서 천주교도(天主敎徒)로 믿음을 바꾼 것이다. 이해 목당은 소화기능이 나빠진데다가 하혈마저 있어 진찰을 받게 되었는데, 대장암(大腸癌)으로 밝혀져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내일은 수술을 받는다는 9월 25일의 일이다. 목당은 아내 남(南)씨에게 세례를 받겠으니 남산 밑 해방촌 성당 신부(神父)를 불러 줄 것과 나익진(羅翼鎭) 부부를 배석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는 불암산 기슭의 흥국사를 정하고 절기(節期)마다 찾았다.
부인 남씨는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정성껏 참기름을 내어 시주(施主)를 하곤 했다. 그런 터에 대수술을 앞에 두고 목당이 가톨릭에의 개종(改宗)을 결심한 것이다.
대수술에 앞서 그가 개종을 했다는 것은 생사(生死)와 피안(彼岸, 생사(生死)의 경계(境界)인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인 열반(涅槃)에 다다르는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목당은 학문에 있어 실용주의 입장에 서 있었다. 영국 생활 10년에 인격도야(人格陶冶)에 있어서는 군자(君子)요 영국인들의 기사도(騎士道)를 익혔고, 종교에서는 불교와 가톨릭(성공회(聖公會))을 깊이 비교해 보았음에 분명했다.
목당은 언젠가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권유로 ‘동서의 피안(東西의 彼岸)’이란 책을 읽은 일이 있었다. 저자 우징숑(吳經熊)은 중국의 린위탕(林語堂)에 비유되는 석학으로 동서사상(東西思想) 비교학(比較學)의 권위자였으며, 그의 책을 번역한 김익진(金益鎭) 또한 중국에서 한학(漢學)을 한 석학이었는데 우징숑은 목당이 영국에 유학할 무렵 역시 런던대학에서 언어학을 한 철학도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불교를 신앙으로 가지고 성장하다가 가톨릭으로 귀의하고 있었다.
‘동서의 피안’은 생사의 관념(觀念)은 동과 서가 다를 것이 없다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서술한 책이었다. 같은 사상적 환경에 있는 우징숑의 견해는 실감있는 공감(共感)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아무튼 생사관(生死觀)에 대한 오랜 편력 끝에 목당은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뜻)으로 생사를 반복한다는 불교의 윤회설(輪回說)보다는 가톨릭의 부활설(復活設)을 택한 것이다.
이왕 세례를 받으려면 잘 아는 노기남(盧基南) 대주교나 김수환 추기경이 좋지 않겠는가고 옆에서 권하는데 대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가는데 권세가 필요하단 말이오?”하고 나무라는 목당이었다.
이리하여 며칠 간격으로 문병을 와 주던 노기남 대주교를 마다하고 갓 신부가 된 부인 남씨의 친구 아들이 착좌했다는 해방촌 성당의 이 미카엘(이동환) 신부를 택하여 영세를 받았다. 영세명(領洗名)은 ‘이 베드로’였다. 대부(代父)는 해방촌 성당의 신도회장(信徒會長)인 유용근(兪龍根, 분도 요셉라부르)이 되고 성진대부(聖振代父)는 현석호(玄錫浩)였다.
목당은 해방촌 성당에 1년 가까이, 그리고 정릉동 성당을 거쳐 굴리엘모 신부(金得權)가 집전하는 신당동 성당을 마침내 본당(本堂)으로 정했다. 그리고 목당은 신당동 성당에 공헌한 바 있다 하여 고문(顧問)으로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