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은 대한민국을 대변하는 큰 줄기의 어젠다이자 국가 비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주로 과거보단 미래 지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역대 한국 정치사의 시대정신을 살펴보면 △17대 정치개혁 △18대 국가선진화 △19대 경제민주화 △20대 새정치 △21대 포스트 코로나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독 올해 총선은 건강한 시대정신이 실종됐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도리어 후퇴하는 양상이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권 심판', '검찰 독재 타파'를, 여당인 국민의힘은 '운동권 청산', '국회 독재 심판'을 이번 총선 시대정신으로 규정했다. 제3지대는 '양당 정치 청산'을 들고 나왔다. 상대 진영에게 칼날을 겨누기만 할 뿐인 '심판론' 일색이다. 지난 2월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이재명 당 대표가 시대정신"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당리적 프레임에 가까운 외침이 극성 지지층을 제외한 보편 다수의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여야는 건강한 시대정신 찾기를 포기한 듯하다. 그보다 쉽고 확실한 'OO비 지원'이 이번 총선의 시대정신을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전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을 약속했고, 국민의힘은 육아 휴직 급여를 60만원까지 인상하기로 했다. 여야는 이 밖에도 다수의 현금성 지원을 공약했다.
물론 국민들이 확실히 체감할 수 있는 민생과 복지 공약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지도자라면 나무와 함께 숲을 바라봐야 한다. 현금성 복지 및 지원에 매몰되지 않고 큰 줄기의 국가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자가 현장에서 만난 한 후보는 "어차피 안 될 거니까 상대당보다 더 센 공약을 내는 거야. 저쪽이 1억원 준다 하면 우리는 2억원 준다고 할거야"라고 말했다.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현금성 복지 공약이 어쩌면 공약(空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엔 무거운 말이었다. 민생이란 이름으로 복지 공약만이 남발된 이번 총선에서 여야는 모두 총선이 끝나고 난 뒤 재원 마련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