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지적장애인이 범죄자로 누명을 썼던 ‘삼례 나라슈퍼 강도 사건’과 ‘수원역 노숙소녀 살해사건’이 발생한 지 각각 24년과 16년이 흘렀다. 사법당국은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들에게 '조사실'과 '법정'은 여전히 차별과 오심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발달장애인 등에 대한 법무·사법행정은 수사부터 재판까지 아직도 국제 수준에 미달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장애인이 배제된 사법정책 현황을 짚고 대안을 모색한다. <편집자 주>
# 2021년 5월 경기 안산에서 성인 자폐성 장애인 A씨가 경찰에 체포됐다. 즐겨 보던 야생동물 다큐멘터리 대사를 어눌한 발음으로 흉내 낸 것이 외국인 노동자의 성추행 범죄라고 오해를 산 것이다. 당시 경찰은 A씨가 자폐 증세를 보였음에도 발달장애인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고 이탈 시도나 위협 행동이 없었는데도 현행범으로 간주해 뒷수갑을 채운 채 연행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해당 사건에 대해 경찰청장에게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현장 대응 매뉴얼을 마련해 일선에 배포할 것을 권고했다.
수사 단계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절차 보장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수사 착수 시 발달장애인을 확인하지도 않고 체포하거나 부당한 구금이 이뤄질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는 분석이다. 수사 과정에도 진술 조력을 도와줄 신뢰관계인 동석 등이 부실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수사기관을 대상으로 한 전문적인 교육·훈련 등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제언한다.
발달장애 확인 않고 체포···인권위 권고에도 유사사례 재발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그간 발달장애인 수사와 관련해 인권위 등 유관기관의 주요 권고에도 불구하고 발달장애인에 대한 수사기관의 초기 대응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1월 경기 평택에서는 동물학대가 의심된다는 이유로 경찰관 3명이 발달장애인 C씨 집을 방문해 속옷 차림인 그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체포 과정에서 문을 닫거나 실랑이가 있었다는 이유로 경찰은 C씨를 공무집행방해와 동물학대 등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체포 과정에서 발달장애인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는 없었다.
앞서 인권위가 경찰에 대해 관련 개선사항 마련을 권고한 후였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재발한 것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지난해 3월 해당 경찰관들을 고소하고 지난해 말부터 관련 불송치 결정에 대한 이의절차도 진행 중이다.
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최근에는 경찰도 묵비권 고지 시 질문지를 통해 발달장애인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고는 있다”면서도 “수사 첫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발달장애인이라는 인식이나 이해가 있어야 이후 수사 과정에서도 관련 절차 보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추가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일선 수사기관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장애 특성별 초기 대응에 대한 훈련이나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최 변호사도 “미국은 발달장애인 여부 식별 등 초기 대응 교육에 일정 시간을 의무적으로 투자한다. 그래야 발달장애인 전담 경찰관 제도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은 ‘미국장애인법(ADA)’을 제정하고 이를 통해 경찰 등 법 집행자들이 지적장애인을 부당하게 체포하거나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도록 훈련한다. 미국 법무부는 ‘형사사법과 장애센터’를 통해 법 집행자들에게 발달장애인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대응하는 방식을 교육하고 있다. 콜로라도 등 일부 주(州)에서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수사 시 초기 대응 관련 교육을 의무적으로 이수토록 하고 있다.
진술조력 제도 유명무실···“‘어려운 수사’는 간접차별”
수사기관 조사 과정에서 발달장애인 방어권 보장을 위해 마련된 전담조사관이나 신뢰관계인 제도 역시 유명무실한 상태다. 이로 인해 수사나 조사 과정에서 발달장애인에 대한 조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지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수사를 전담하는 전담조사관 제도는 발달장애인법에 의해 2015년 도입됐다. 도입 초기인 2016년에는 전담조사관이 전국에 1300여 명 있었지만 이후 수사기관이 자율로 지정하도록 하면서 2021년에는 700명 수준으로 줄었다.
전담조사관을 대상으로 장애인에 대한 조사 기법을 교육하고 있지만 실무에서 사용하는 사례도 거의 없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다. 수사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다 보니 사실상 제도가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발달장애인 피의자에 대한 신뢰관계인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신뢰관계인 제도는 원래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이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기 어려울 때 재판에 동석하도록 하는 제도다. 피의자 신뢰관계인 제도는 법무부령인 사법경찰관리 집무규칙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신뢰관계인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김지영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신뢰관계인 제도는 경찰 수사에서 의무사항이 아니다. 수사에 지장이 있다고 판단될 때는 동석을 중지할 수 있어 수사기관이 자의적이고 수사편의적으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관련 보고서에서 지적했다.
김아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간사는 “전담조사관이나 신뢰관계인 제도에 대한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한 추가적인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가 많다. 실효성이 낮다 보니 인지도도 더욱 낮아지고 있다”며 “실제로 최근 접수한 인권 침해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 해당 제도 자체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최 변호사는 “수사나 조사 과정에서 사용되는 절차나 용어 자체가 어려운 게 많아 발달장애인은 수사 조력을 필수적으로 요하지만, 실상은 이런 부분에 대한 개선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발달장애인에 대한 ‘어려운 수사‘는 장애인 차별금지법상 ‘간접차별’이라는 점을 수사기관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