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PC 제조업체인 레노버(롄샹·聯想)가 상하이 증시에 상장하려던 계획을 스스로 접은 데 대한 뒷말이 무성하다.
최근 중국 대형 정보기술(IT) 기업을 향한 당국의 고강도 규제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주로 거론되는 이유다.
어쨌든 거액의 자금을 유치해 사업 다각화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전략은 궤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글로벌 PC 시장이 포화 상태에 달한 데다, 새로운 성장동력도 딱히 눈에 띄지 않아 레노버가 기로에 선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주목 받은 커촹반 상장 돌연 철회
지난달 30일 상하이증권거래소는 공고를 통해 레노버가 중국주식예탁증서(CDR) 발행 방식으로 커촹반(科創板·과학혁신판) 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CDR는 해외에 상장된 중국 기업의 주식을 중국 본토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중국 내로 재유치하기 위해 도입됐다.
레노버는 이미 홍콩에 상장돼 있다. 앞서 레노버는 지난 1월 커촹반 상장 신청 계획을 공시한 바 있다.
그런데 국경절 연휴 직후인 지난 8일 상하이증권거래소는 레노버가 상장 신청을 철회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10일 레노버도 상장 철회를 공식 인정했다. 레노버 측은 "회사의 업무 규모와 복잡도를 고려할 때 상장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투자설명서 내의 재무정보가 효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내놨다.
이어 "최근 상장 등 자본시장 관련 상황을 신중히 고려한 뒤 내린 결정"이라며 "(상장 철회가) 회사 재무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레노버는 이번 커촹반 상장으로 100억 위안(약 1조8436억원)의 신규 자금을 유치해 인공지능(AI)과 클라우드 등 분야의 인프라 확충을 추진할 예정이었다.
회사의 미래가 달린 계획을 손바닥 뒤집듯 변경하니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더구나 중국 당국이 홍콩에 상장된 중국 기업의 본토 추가 상장을 독려하는 가운데 레노버가 첫 사례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은 이례적이었다.
◆포기인가 낙제인가, 혁신성 부족 걸림돌
이에 대해 레노버의 재무구조로는 상장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퍼스트시프론트펀드의 양더룽(楊德龍)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신문주간에 "재무 수치가 좋지 않았던 게 기업공개(IPO)를 중단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투자설명서를 살펴보면 2018~2020년 레노버의 부채비율은 각각 86.3%, 87.4%, 90.5% 등으로 상승세를 그렸다.
양 이코노미스트는 "부동산 기업 등 원래 레버리지 비율이 높은 업종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상장사는 부채비율이 60%를 초과하지 않는다"며 "(레노버의 부채비율이) 90%를 넘는 건 경영 리스크가 비교적 크다는 걸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일례로 레노버의 경쟁 상대인 대만계 PC 제조업체 에이서의 경우 부채비율이 68.4% 수준이다.
유동화가 가능한 순자산(234억5000만 위안)에 비해 무형자산(552억3000만 위안) 규모가 현저히 큰 것도 부정적인 변수다.
무형자산 중 영업권(영업 노하우나 브랜드 인지도 등 식별이 어려운 자산)으로 분류된 금액만 318억5000만 위안에 달한다.
베이징안터법률사무소의 따이웨창(代月强) 변호사는 중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무형자산은 시장 경쟁력을 드러내는 수치이지만 레노버처럼 영업권 비중이 과도하게 높은 건 기술력이 브랜드 인지도에 못 미친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부실한 재무구조와 더불어 혁신성이 부족한 기업 문화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지난해 기준 커촹반 상장사 중 상위 100개 기업의 평균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은 11.97%로 집계됐다. 레노버는 이 수치가 3% 정도로 4분의1에 그친다.
2018~2020년 레노버의 R&D 투자액은 각각 102억 위안, 115억 위안, 120억 위안이다. 총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98%, 3.27%, 2.92%다.
중국 싱크탱크 판구연구소의 장한(江澣) 고급연구원은 "레노버는 마케팅에 의존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고 R&D 역량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돼 왔다"며 "정부가 커촹반 상장사에 요구하는 건 핵심 기술"이라고 말했다.
이어 "레노버는 이 요구 조건과 거리가 멀다"며 "국가의 전체적 요구를 감안해 스스로 상장을 철회한 것 같다"고 전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설립을 지시한 커촹반은 '중국판 나스닥'을 표방한다. 경쟁력 있는 첨단기술 기업을 육성하는 게 과제다.
결국 상장 철회가 자발적 결정이든 혹은 당국이나 거래소의 압박 때문이든 간에 상장 심사 문턱을 넘기에는 기준 미달이었다는 얘기다.
◆'하드웨어 기업' 이미지 벗을 수 있을까
지난해 글로벌 PC 시장 내 레노버 점유율은 24%로 1위다. 2013년 이후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전체 매출 중 PC 및 스마트 장비 비중은 90%에 육박한다. 데이터센터와 소프트웨어 사업 비중은 10% 미만이다. 전형적인 하드웨어 판매 기업이다.
류촨즈(柳傳志) 창업자의 뒤를 이어 레노버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양위안칭(楊元慶)은 체질 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2012년 'PC+' 전략을 외치며 모토로라의 휴대폰 사업부를 인수했고, 2017년부터는 모바일과 데이터센터 경쟁력 강화를 강조해 왔다.
클라우드와 사물인터넷(IoT), AI 분야로도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하지만 전체 매출 중 각 사업 분야별 비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푸시연구소 창립자인 리샤오둥(李曉東)은 "밖에서 보기에 레노버는 여전히 하드웨어 기업"이라며 "매출 구조나 대중의 인식을 감안할 때 (체질 개선 노력이) 특별한 성공을 거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냉정하게 짚었다.
장한 연구원도 "영업에 특화된 유전자를 가진 기업이 R&D 기업으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다"며 "장기간에 걸쳐 비용을 투입하고 단기간 내에 실적을 내려는 유혹을 극복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