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회계 조작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중국의 루이싱(瑞幸·Luckin)커피.
'중국판 스타벅스'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다가 4000억원대 회계 조작이 사실로 드러나 어렵사리 입성한 미국 나스닥 시장에서도 퇴출당하며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비용 감축과 가격 합리화, 경쟁력 있는 신제품 출시 등에 힘입어 실적이 개선되자 발길을 돌렸던 큰손들도 다시 지갑을 여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루이싱커피가 되살아날 수 있었던 원동력은 20~30대 젊은 층의 호응이다.
심각한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에도 불구하고 보이콧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래도 여전히 스타벅스보다 싸다"며 가성비를 강조한다.
실리적인 건지, 도덕 불감증에 빠진 건지 판단하기 어려운 소비 행태다.
덕분에 루이싱커피는 180조원을 넘어설 중국 커피 시장에서 스타벅스를 꺾고, 여세를 몰아 재상장을 추진한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점포 60% 이상 이익 내는 중"
지난해 초 공매도 전문 기관인 머디워터스의 89쪽 분량 보고서를 통해 루이싱커피가 22억 위안(약 4016억원) 규모의 매출을 조작한 사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주가가 폭락하며 수많은 투자자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중국 기업에 대한 신뢰성도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CES)는 상장 폐지를 결정했고, 루정야오(陸正耀) 회장과 첸즈야(錢治亞) 최고경영자(CEO) 등 경영진 대부분이 해고됐다.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궈진이(郭謹一)가 회장 겸 CEO를 맡아 회사 추스르기에 나섰지만 루이싱커피의 앞날을 긍정적으로 내다보는 시선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자가 거주하는 베이징 차오양구를 비롯해 중국 대도시 곳곳의 루이싱커피 매장은 여전히 고객을 맞고 커피를 팔았다.
문을 닫는 매장도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망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던 중 지난 21일 루이싱커피는 흥미로운 내용의 성명을 내놨다.
사측은 △미국 집단소송 원고인단과 1억8750만 달러 규모의 합의 의향서를 작성했고 △케이맨 제도 법원에 전환사채 관련 채무 조정안을 냈으며 △미국 SEC에 2020 회계연도 사업보고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SEC는 루이싱커피 사태 이후 회계 감사 검증을 받지 않는 중국 기업을 미국 증시에서 퇴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싱커피가 감사 의견을 담은 사업보고서를 냈다는 게 관심을 끌었다. SEC가 이를 인정하면 루이싱커피의 경영 정상화에 탄력이 붙을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지난해 매출액은 40억3300만 위안으로 전년 대비 33.3% 증가했다. 영업손실은 26억 위안으로 적자폭이 20% 줄었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11월부터 전체 루이싱커피 매장의 60% 정도가 이익을 내고 있다"며 "올 상반기에는 수천만 달러 규모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적자에서 벗어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소식이 사실이라면 중국 내 토종 커피 브랜드 중 처음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한 사례가 된다.
회생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기관 투자자들도 재투자에 나서기 시작했다.
루이싱커피는 지난 4월 15일 기존 주주인 센트리움캐피털(2억4000만 달러)과 조이캐피털(1000만 달러)로부터 총 2억5000만 달러 규모의 자금 수혈을 받았다고 발표한 바 있다.
재무구조 개선 등 특정 조건이 만족되면 1억50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박리다매 대신 실속 경영 선회
루이싱커피는 방만했던 경영 관행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해 말 기준 직영 매장 수는 3929개로 전년 대비 12.8% 감소했다. 그에 따른 직원 구조조정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때 스타벅스 매장 수를 능가했던 루이싱커피는 현재 중국 56개 도시에서 직영점과 가맹점(874개)을 합쳐 4803개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과도한 마케팅 비용도 대폭 줄였다. 2019년 12억5000만 위안에서 지난해 8억7700만 위안으로 감소했다.
가장 주효했던 건 가격 합리화 정책이다. 루이싱커피는 싼값으로 판매하는 박리다매 영업 방식으로 유명했다.
회계 부정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10위안 미만의 제품이 허다했다. 최근에는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이 13위안, 라떼는 15위안 수준이다.
과일 등이 첨가된 음료의 경우 20위안 중반대 가격의 제품도 있다. 제 살 깎아 먹기였던 할인 쿠폰 제공도 축소했다.
지난 3월 루이싱커피가 가격 인상을 선언하자 웨이보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질 정도로 화제였다.
가격은 올랐는데 고객은 오히려 늘었다. 지난해 루이싱커피의 누적 이용객 수는 6490만명으로 전년보다 2430만명 급증했다.
오프라인 매장과 무인 점포인 '루이지거우(瑞卽購·루이싱 익스프레스)'를 통한 월평균 주문량도 2019년 2420만건에서 지난해 2620만건으로 늘었다. 올 들어서는 3160만건으로 껑충 뛰었다.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 노력으로 코코넛 즙을 넣은 라떼와 레드베리 스무디 등이 젊은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이른바 대박을 쳤다.
생 코코넛 라떼의 경우 웨이보에서 관련 조회 수가 6000만회를 돌파했다.
루이싱커피의 한 점장은 중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여름이 되면 매주 하나씩 신제품이 출시된다"며 "새로 출시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직원들은 '루이싱 대학'이라는 앱을 통해 매주 3~5시간씩 제조법을 익혀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신제품 개발 과정에서 많은 아이디어가 제시되는데 실제로 출시되는 건 22건당 하나 꼴"이라고 귀띔했다.
대도시의 20~30대 직장인들은 루이싱커피의 장점으로 가격 대비 맛, 즉 가성비를 꼽는다.
기자와 만난 한 직장인은 "가격이 올랐다곤 해도 여전히 스타벅스와 비교하면 경쟁력이 있다"며 "맛도 큰 차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직장인은 '패스트 커피'라는 표현을 썼다.
가격이 비싼 스타벅스 매장을 찾는 건 사진을 찍거나 업무를 보는 등 부가가치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지만, 단순히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땐 루이싱커피에서 빠르게 테이크 아웃을 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지난해 터졌던 루이싱커피 스캔들에 대해 묻자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고 다른 고민거리도 많은데 커피 한 잔 마실 때 그런 사정까지 감안해야 하는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지방 공략이 관건, 재상장 성공할까
중국 커피 시장의 성장 잠재력이 크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미국 농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커피 소비량은 335만 포대(포대당 60㎏)로 전년보다 4.8% 증가했다.
2018년 310만 포대, 2019년 325만 포대 등으로 증가세가 완연하다.
벤처 투자사인 레몬벤처스는 지난해 3000억 위안이었던 커피 관련 산업 규모가 2025년에는 1조 위안에 달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도 내놨다.
지난해 중국의 1인당 커피 소비량은 연간 9잔에 불과하다. 한국은 367잔, 미국과 일본도 각각 329잔, 280잔씩 마신다.
다만 대도시의 사정은 다르다.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 등 1선 도시의 경우 326잔으로 한국이나 미국과 큰 차이가 없다. 이미 시장이 포화 상태라는 의미다.
결국 루이싱커피 등 중국 내 커피 브랜드의 지속 성장 여부는 지방 공략에 달렸다는 얘기다.
중국에서 커피 프랜차이즈업을 하는 한 교민은 "1~2선 도시와 달리 3~6선 중소 도시는 커피 선호도가 낮아 시장 진입 자체가 어렵다"며 "직영점 대신 가맹점을 늘리는 방법이 있지만 품질 관리가 쉽지 않은 등 난관이 많다"고 지적했다.
루이싱커피가 다시 상장을 시도할지도 관심사다.
조만간 집단소송의 덫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고 실적도 나아지면서 자연스레 몸값이 오르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루이싱커피 주식 가치는 미국 장외주식시장(OTC)에서 500% 넘게 폭등했다. 지난 22일 기준 거래가는 15.05달러였다. 상장 폐지 전 주가의 50% 수준까지 회복됐다.
시장에서는 루이싱커피의 증시 재입성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재무구조 조정이 완료되고 흑자 전환도 수치로 확인된다면 재상장에 나설 여건이 조성되는 셈"이라며 "미국이 어렵다면 중국에서 기업공개(IPO)에 도전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