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장충위안 회장은 한국에서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러나 컨버스, 나이키, 푸마 등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의 운동화가 그의 공장에서 제조됐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가 40년간 제조한 신발만 수십억 켤레. ‘당신은 한번쯤 화리그룹에서 제조한 신발을 신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매 순간 신발에 ‘진심’이었던 장충위안의 삶을 중국 제몐이 최근 소개했다.
◆돼지농장에서 창업··· 모두가 피하는 컨버스화 제조 뛰어들어
제몐에 따르면 지난 5월 6일 포브스가 발표한 대만 부호 순위에서 1위에 이름을 올린 건 세계 최대 전자제품 위탁생산 업체인 폭스콘 창업자인 궈타이밍(郭台銘)도, 중국 식품 거물 캉스푸(康師傅)의 창업주 웨이(魏)씨 일가도 아니었다. 장충위안 화리그룹 회장이었다.
물론 장 회장이 처음부터 수백억 위안의 자산가는 아니었다. 그는 1948년 대만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농업학교를 졸업했지만 20세 이후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지역의 작은 신발공장에서 관리직으로 일했다.
이렇게 신발과 첫 인연을 맺은 장 회장은 1980년대 스스로 신발공장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형편에 맞는 작은 돼지 농장을 사들여 그곳을 신발공장으로 운영했다. ‘징신(景新)신발’이라고 이름 붙인 이 돼지농장의 신발공장이 화리그룹의 시초가 된 셈이다.
징신신발은 주로 컨버스화를 제조했다. 사실 당시 수익이 좋았던 제품은 축구화와 농구화였다. 대만은 고무가 풍부하고 재료가 저렴했다. 따라서 연구개발 비용이 따로 필요없는 일반 운동화를 생산하면,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다.
반면 컨버스화는 밑창 제조에 드는 비용이 많았다. 일정한 온도와 압력으로 고무창과 신발 본체가 자연스럽게 붙도록 하는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혹여 밑창과 컨버스가 너무 단단하게 붙어버려도 품질 보장이 안 됐다. 이에 따라 많은 신발 제조업체들은 컨버스화 제조를 포기하곤 했다.
그러나 장충위안은 “남들이 하지 않는 장사를 한다면 경쟁이 심하지 않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로 컨버스화 제조에 뛰어들었다. 가장 돈이 안 되는 컨버스화가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세계의 신발 공장 대만'과 함께 성장··· 대륙 진출로 승승장구
이후 장 회장의 신발공장은 대만 신발 제조업 발전과 함께 빠르게 성장했다. 사실 대만의 신발 제조업은 1970년대부터 부흥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이 자국산 제품의 제조원가를 낮추기 위해 값싼 노동력을 보유한 대만 중부 지역에 진출했고, 고무가 저렴했던 대만은 순식간에 세계의 신발공장이 됐다.
1980년대 대만에는 수십개 글로벌 신발 위탁 제조 공장이 생겨났는데, 이때 장 회장이 새롭게 세운 훙푸(宏福)라는 공장이 대만 신발 제조업의 중심이 됐다. 당시 푸마와 컨버스가 찾은 첫 번째 파운드리 공장이 훙푸였기 때문이다.
훙푸와 함께 대만 신발 제조 업계는 승승장구했다. 1986년 대만에서 수출된 신발은 8억 켤레에 달했는데, 당시 세계 인구가 49억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 세계에서 6명 중 1명이 대만산 신발을 신은 셈이다.
그러나 1988년 파운드리 산업으로 대만 경제가 쾌속 성장을 이루면서 대만 달러 가치가 급등하자, 신발 수출이 얼어붙었다. 그해 1~4월 대만의 대(對) 미국 신발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30% 쪼그라들었다. 대만 신발협회에 따르면 1988~89년 사이 무려 600여개 신발 제조 공장이 문을 닫았다.
결국 1990년 다수의 신발 제조 업체들은 대륙행을 택했는데, 장 회장도 이 행렬에 동참했다. 그는 홍콩의 한 기업과 합자해 ‘신펑(新沣)그룹’을 설립하고, 제조 공장을 대륙에 세웠다.
신펑그룹은 중국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해 급성장할 수 있었다. 제몐에 따르면 당시 대만 신발 노동자 인건비는 시간당 1.55달러였는데, 중국 신발 노동자 인건비는 하루 1.75달러였다. 여기에 중국 개혁·개방의 정책적 이점까지 더해지면서 신펑그룹은 짦은 시간 안에 대만에서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빠른 경제 성장 탓에 인건비가 치솟았다. 2012년 운동화 재벌 아디다스가 중국 내 유일한 자체 공장을 폐쇄하고 동남아로 생산라인을 옮기겠다고 선언하면서 대만계 신발 제조업체들은 다시 한번 짐을 쌌다. 인건비가 저렴한 동남아로 이전하기 위해서다.
당시 신펑그룹은 1995년 홍콩증시 상장 이후 스포츠 브랜드를 만들고, 부동산 투자를 늘리는 등 사업을 다각화했는데, 결국 2013년 7월 신발 제조 사업 지분 전량을 매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신발 사업을 전부 인수한 건 장 회장이었다.
◆신펑그룹→화리그룹으로 독립 운영··· 저렴한 베트남 노동력에 의존
이후 신펑그룹의 신발 제조 사업을 모두 인수한 장 회장은 ‘화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독립 운영하고 있다.
현재 화리그룹 직원 대부분은 베트남 북부에 있으며, 중국과 대만에서의 생산직 비율은 0.3%에 불과하다. 2020년 상반기까지 화리의 전체 신발 생산량 7540만 켤레 중 베트남에서 생산된 제품만 7461만 켤레에 달한다. 전체의 약 98.9%가 베트남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신발 제조 사업의 기본이 ‘저렴한 제조원가’라는 것을 인지한 장 회장이 모든 생산 설비를 베트남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이 전략은 주효했다. 상반기 기준 화리가 제조한 나이키 제품의 평균 판매 단가는 80.2위안이다. 공장이 주로 대만과 대륙에 있는 대만 신발 제조업체 펑타이(豐泰)의 나이키 평균 판매 단가가 120~140위안 수준인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저렴하다.
생산면에서도 화리는 대만의 다른 신발 제조업체들에 비해 월등히 앞서 있다. 2019년 위위안(裕元), 위지(钰齊), 타이펑의 1인당 신발 생산량이 각각 연간 929켤레, 927켤레, 792켤레인 반면, 화리의 1인당 생산량은 1378켤레다.
게다가 다른 동남아 국가에 비해 베트남은 중국과 가까워 운송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유럽과 미국에 대한 수입관세가 낮다. 화리가 지속적으로 성장세를 거두고 있는 이유다.
2018년 위위안, 위지, 타이펑 등 신발 제조업체들의 매출 성장률은 각각 -2.12%, -3.91%, 9.41%로 평균 0.97% 수준이었다. 그러나 화리는 매출 성장률 23.96%를 기록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했던 지난해에도 화리는 전년 동기 대비 7.27% 증가한 18억8699만 위안의 순익을 달성했다.
다만 저렴한 노동력에 의존한 신발 위탁 제조업체의 미래는 불안하다. 장 회장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장 회장은 "화리는 위탁 제조에서 디자인까지 사업을 확장해 향후 강력한 디자인을 갖춘 자체 제작 제품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