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기독교와 동양의 사상들 간에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인상적인 차이는 '삶에 대한 매뉴얼'이다. 기독교의 근간을 새롭게 한 예수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반면 제자들에게 삶의 교본이나 모범적인 인생경영 방식에 관한 가르침이나 구체적인 언급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다만, 신을 증거하는 죽음을 보여주고 갔다. 이 일은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예수의 육신은, 신의 메시지를 적재한 캐리어(Carrier)였으며, 그걸 증거하였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이 '얼나'로 함께 있고, 신이 인간에게 얼나로 임재할 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죽음으로 알려준 일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유대교가 지니고 있던 '특정 민족에 대한 사랑'을 확장하여, 그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신의 성령에 들 수 있다는 확고한 메시지를 보여준 것이, 기독교를 인류의 종교로 성장하게 만든 기폭제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신앙에 대한 매뉴얼은 투철하고 확고하게 갖추게 되었으나, 인간 삶에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매뉴얼은 신앙하는 이들이 스스로 찾아야 했다. 예수의 삶이 오직 '죽음'의 미션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긴급한 일이 아닌 일상사의 코칭은 할 겨를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 신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자율이지, 신이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알맞지 않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류영모는 자기 삶의 길을 스스로 찾아 나섰다. "한 가지 뚜렷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기존 이론에 묶이거나 매달리지 말고 내 생각을 맘대로 하는 것이다. 맘에 따라서 미정고(未定稿, 완성되지 않은 이론)를 이어받아 완결을 짓도록 노력하는 것이다"(다석어록).
류영모는, 기독교를 만나면서 죽음에 대한 문제들이 완전하게 풀리는 것을 경험했으나 삶의 경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삶의 경영에 관한 윤리철학은 오히려 그가 그 전부터 배웠던 동양철학이나 사상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문제는 중요하다. 서구 기독교가 '신앙에 따른 삶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편으로 교리와 교회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신의 메시지와 예수의 가르침을 세속화했다는 혐의를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동양 사상의 수신(修身)은, 신의 존재를 설정하여 거기에 닿으려는 방편이 아니라, 인간 몸과 삶의 문제들을 윤리와 규범으로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상태를 고등(高等)의 정신으로 높이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불교와 유교와 노장사상은 상당 부분이, 수신의 사상이다. 그것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목표보다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을 우선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은 이기적 삶이 아니라, 흐름을 통찰하여 번민을 줄이는 한편 세상을 위해 기여하는 사회적 덕목을 강조하는 취지들이다. 물론 사상이 저마다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한꺼번에 묶을 순 없다. 불교는 '개관(槪觀)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고, 노장은 '관점의 교정을 통한 성찰적 행동'을 요구하고, 유교는 "윤리적 본질과 모델을 통한 사회적 성숙'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나름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유불선(儒佛仙)은 모두 깨달음과 성찰과 성숙을 향한 수신(修身)을 권장하고 있다.
선악과 원죄론과 대속(代贖)의 의미
류영모는 기독교의 근본적 문제가, '신앙이 지녀야 할 자율적 수신(修身) 교과서'가 없다는 점에 있다는 동양적 직관을 해냈을 것이다. 수신은, 나를 믿느냐는 '믿음 검문(檢問)과 확인'이 아니라, 신앙하는 자로서의 자기 완결성을 갖추려는 노력이다. 류영모는 이 대목에서 기독교의 원죄론을 주목했다. 성서는 최초의 인간이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근본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죄악은 신이 줬던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수 있는 근본적인 결함을 타고났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바울은 원죄론을 '신과의 단절과 죄의 유전'이라는 의미로 확장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인간은 불순종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형상을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사망에 이르게 됐다(롬 5:12)." 바울은 인간 본성의 사악함 때문에 신과의 교신이 끊어졌으며, 오직 대속(代贖, 예수의 죽음)으로 신의 마음을 돌려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의 문제는,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뭉뚱그려 죄 사함을 받은 불안정한 상태의 해결이라는 점이다.
은유적인 선악과 스토리에 묶어 '원죄를 지닌 인간'을 대책없이 비판해온 논리는, 신의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는 진실된 면모가 없다고 류영모는 판단했다.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심어 종교적인 결속을 이끌어내려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원죄론을 동양적 '수신론'에 결부함으로써, 삶의 규범으로 이끌어냈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貪瞋痴)가 그것이다. 탐진치는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해탈을 막는 인간 마음의 삼독(三毒,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말한다. 티벳의 윤회도에는 탐욕을 수탉으로, 분노를 뱀으로, 어리석음을 돼지로 그려서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한다. 탐진치를 짐승이 지닌 성질로 본 것이다. 류영모는 불교의 탐진치를, 인간이 타고나온 원죄의 진상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바울의 원죄와 대속 논리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삶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요강(要綱)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식욕,공격욕,색욕이 인간 원죄다
불교에서 탐진치를 짐승으로 표현한 것처럼, 류영모는 이것을 인간 안에 들어있는 수성(獸性)이라고 말했다. 인간과 짐승은 태어나면서 탐진치를 내장하고 나왔지만, 인간은 영성을 함께 타고 났기 때문에 수성을 제어하고 극복하여 신과 완전한 결합을 이룰 수 있다고 밝혔다.
류영모는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를 좀 더 구체적인 의미로 직결해 인간의 본능적 약점을 관리하는 3가지 포인트로 삼도록 했다. 탐욕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식욕(食慾)을 중심으로 한 탐심이라고 보았고, 진에(瞋恚, 성내는 일)는 남을 공격하는 욕망이라고 했고, 우치(愚癡, 어리석음으로 저지르는 일)는 색욕으로 규정했다.
류영모는 이것을 사람이 지닌 짐승 성질이라고 했다. 짐승은 먹고 교접하고 으르렁거린다. 인간도 이 성질에 빠져 있으면 짐승을 벗어나지 못한다. 동물학자들이 동물의 본능을 feeding(貪) , fighting(瞋) , sex(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인간의 '몸나'는 짐승성질을 원죄로 타고 났으며, 얼나로 거듭나는 길은 그 탐진치를 극복하는 수행이라고 밝힌 것이다. '탐진치 원죄론'은 류영모가 정립한 기독교 사상이다.
기독교가 까닭 없이 죄의식을 지닌 채 신에게 빚진 존재처럼 굽신댈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여 시험한 선악과처럼 인간 속에 깃든 짐승의 욕망들을 능동적으로 제어하는 일상적 수신(修身)을 제안하고 그 스스로 평생 실천했다.
탐진치는 우리 안에 들어있는 짐승
"우리는 분명히 노여움을 타고났기에 삼독이 내 속에 들어 있다. 삼독을 이겨나가는 일은 올라감이지만 삼독에 지면 떨어지는 것이다. 이 몸은 진생(瞋生, 싸움으로 태어난 목숨)이다. 진(瞋)이 없으면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정자와 우리 어머니의 난소가 무슨 인격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서로 활동하고 경쟁을 하여서 나온 나다. 진이 동해서 나온 나도 진이다. 그리하여 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작도 경쟁이니 일생 동안 진이 내게서 떠날 리가 없다. 삼독으로 잉태되었고 삼독으로 자라난다. 성경을 보면 원죄가 있다고 하나, 나는 원죄가 아니라 이 삼독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삼독보다 구체적인 원죄가 어디 있는가"(다석어록).
류영모는 하루한끼(일일일식) 식사와 간헐적인 단식으로, 식욕을 평생 다스렸다. 51세 때인 1941년부터 타계하는 1981년까지 40년간 이어진 수행이었다. 류영모는 말했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끼씩 먹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것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야 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우리 몸은 신이 머무는 성전이다. 성전에 드리는 제사가 바로 밥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밥 먹는 일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예배 드리는 마음으로 밥을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이 흐뭇함이 아니라 먹지 않는 거기에 흐뭇함이 있다."
이런 스승을 보고, 많은 이들이 한끼를 따라 실천하기 시작했다. 함석헌, 김흥호, 서완근, 박동호는 한끼에 성공했고 염낙준, 주규식, 류자상(아들)은 하루 두끼를 먹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실천이 과연, 저 류영모의 원죄에 갈음하는 기독교도의 수신(修身)이라는 심오한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느냐일 것이다. 정신이 육체를 먹으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낸다는 뜻은, 얼나를 부양하기 위해 짐승을 죽여 바치는 '희생양'의 의식을 의미한다.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데, 유교에서는 기도를 수신이라고 한다. 입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 그러면 마침내 머지않아서 하느님께 다시 이르게 된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도록 참나를 길러가는 것이다"(다석어록).
일식(一食), 해혼, 시골살이는 몸으로 하는 기도
남을 공격하고 싸우는 '진에'의 행위를 이기는 일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과도 같다. 예수가 인간의 삶을 향해 던진 최고의 메시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였다. 류영모가 어려운 이를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스스로가 모아온 재산을 봉사에 기꺼이 내민 것은, '무진(無瞋, 성냄이 없음)'의 자비를 실행하는 일이었다. 시골로 내려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짓는 삶은 인류를 향한 가장 진실한 봉사의 수행이라고 류영모는 생각했다. 자식에게도 그 삶을 권했다. 스스로가 높이 되는 게 아니라 씨알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생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같은 사상은, 류달영이나 김교신, 함석헌과 같은 제자들에게도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
1941년 류영모는 가족을 모아놓고 아내 김효정과의 해혼(解婚)을 선언한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결혼(結婚)을 풀어주는 해혼으로 세상에 적극적으로 봉사하겠다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류영모의 해혼은 그런 풍조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죄로 부여받은 짐승 성질의 하나인 치(痴, 색욕)를 극복하기 위한 수행의 일부였다. 하루 한끼와 동시에 해혼을 선언함으로써 금욕수행의 수준을 높인 것이다. 이날 부부의 방 한가운데에 '사랑의 만리장성'이라 불린 긴 책상이 놓였다.
""남녀의 정사를 쾌락이라고 하지만 대개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도 51세까지 범방(犯房·성생활)을 했으나 이후엔 아주 끊었습니다. 아기 낳고 하던 일이 꼭 전생에 하던 일같이 생각됩니다. 물론 정욕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최대 흥미와 관심은 식색(食色)입니다. 일체 문화활동의 노력하는 초점이 식색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식색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짐승입니다. 짐승은 고뇌도 없이 식색을 자유로이 충족하며 사는 목적이 오직 그것입니다. 사랑은 남녀의 맛이 아니라 남녀의 뜻을 읽어야 합니다. 남녀의 뜻은 신의 거룩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류영모의 금색론(禁色論)이다.
" 얼나로 깨어나지 못하면 짐승새끼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짐승 새끼가 아닌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결코 예수가 겸손해서 한 말이 아니다. 살로만 사는 살살이(肉體生活)는 살 너머는 못 간다. 이것은 정말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도 살은 살이요 영(靈)은 영이라고 했다. 사람은 몸으로는 분명 짐승이다.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는 얼사람으로 솟나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다석어록).
류영모가 자기 삶을 혁신했던 것은, 짐승의 몸으로부터의 탈출을 꾀하는 '얼나의 혁명'이었다. 기독교인이 동양의 수신(修身)을 '하늘로 가는 길'에 접목한 사건이었다. 류영모에게 몸은, 생명을 지니고 태어나는 바람에 얻은 짐승이었고 그 짐승을 얼나의 고등(高等)한 수준에 맞게 길들이는 일이 삶 속에서 행한 수행의 핵심이었다. 영(靈)을 좇는 일과 육(肉)을 길들이는 일이 신과 짐승 사이의 존재인 '인간(人間)'의 길이라고 여겼다. "짐승을 길들이는 데는 알맞게 굶기고 먹여야 한다"고 밝힌 그의 말은, 그가 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표현이다. 탐진치의 짐승을 극복하는 수신만이 얼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이토록 천명했던 기독교인은 없었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