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구 칼럼] 한일 역사화해를 위한 제언

2020-09-25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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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구 교수]




9월 16일 스가 요시히데 씨가 일본의 제99대 총리에 취임했다. 7년 8개월간 관방장관으로서 최장수 총리 아베를 보좌했던 스가 총리는 각료 20명 가운데 모테기 도시미쓰 외상을 비롯한 11명을 아베 내각의 각료로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아베 노선의 계승 의사를 밝히고 있어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지난 16일자 축하서한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본적 가치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 일본 정부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관계개선 의지를 전하자, 스가 총리는 답신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양국 관계 구축’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또한 24일에 실현된 첫 정상 간 전화회담에서 스가 총리는 강제징용문제와 관련한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서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한 계기’를 한국 정부가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지난해 12월 15개월 만에 성사된 양국 정상회담을 제외하면 2019년과 올해 전화회담조차 없었고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보다 먼저 문 대통령과 전화회담이 성사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전후 최악’의 한·일관계를 방치하지 않고 1밀리라도 전진시키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두 정상에게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문제의 해결 없이 한·일관계 개선은 불가능하지만, 필자의 눈에 이 문제의 해결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합의할 수 있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정치도 외교도 국민적 지지 없이는 성립하지 못하는데, 한·일 어느 쪽 국민도 자국의 양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3권 분립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일본의 사법부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이나 법에 의한 피해자 구제가능성에 관해 상반된 입장이다. 즉, 일본 최고재판소는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을 전제로 한·일 간 청구권문제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입장인 반면, 우리 대법원은 식민지 지배는 불법이며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기업은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던 것이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청구권 문제는 양국 정부를 당사자로 한 것이 아니라 개인과 기업 사이에 제기된 문제였다. 강제징용문제는 1965년의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최고재판소의 입장이었지만,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이 식민지 지배의 합법을 전제로 한 일본의 판결은 한국의 헌법적 가치에 반한다면서 처음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결했던 것이 2018년 10월 최종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개인과 기업의 민사소송이기 때문에 가해기업이 피해자에게 배상하면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해결을 어렵게 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대법원 판결 이후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둘러싼 양국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상이해 일본기업의 배상은 곧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일본 정부로서는 방치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해결방식이 가능할까?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에서 강제병합조약의 무효 시점을 명확하게 하지 않은 채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했던 방식으로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할 수 있지만, 지금의 한국사회가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1972년 9월 29일 중국 정부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합의하면서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의 포기’를 선언했는데, 이 조항을 근거로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2007년 4월 27일 중국 정부와 국민이 일본 정부와 국민, 법인을 상대로 피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주목할 것은 최고재판소가 중국인 피해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대단히 컸다는 점을 고려해 판결이 당사자 간의 자발적 해결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가해기업인 니시마쓰(西松)건설은 강제노동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했으며, 2009년 10월 피해자와 유족 360명에게 2억5000만엔(1인당 약 70만엔)을 지급하고 기념비를 건립하는 것에 합의하는 ‘화해’가 성립했다.

2016년 6월 1일에는 미쓰비시 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도 역사적 책임 인정과 사죄, 사죄의 증거로 생존피해자 3765명에게 1인당 10만 위안(약 170만엔)의 위로금 지급과 기념비 건립 등의 조건으로 화해가 성립했다. 1945년 8월까지 일본에 끌려와 강제노동에 동원됐던 중국인이 약 3만9000명에 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유사한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일부에서는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일본 측의 상이한 태도가 한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하지만,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둘러싼 한·일 및 중·일 간의 처리방식이 상이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발생한 일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8월 4일 우리 법원은 압류했던 일본기업의 자산 매각이 가능하도록 공시송달 절차를 마쳤다. 실제로 현금화가 실행되기까지의 시간이 양국 정부에 주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양측이 기존 입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합의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없어 보인다.

이에 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국제사회에 아직 일치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한 빠른 시기에 양국 정상회담을 개최해 한·일 양국 간에 역사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 문제의 해결을 미래 세대의 지혜에 맡길 것을 양국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호소해야 한다. 이를 전제로 법원이 자산 압류를 해제하는 대신 일본기업은 책임 인정과 사죄 및 배상을 통한 피해자 측과의 화해를 모색하고, 양국 정부는 이런 노력을 지원하고 평가함과 동시에 진상규명을 위한 자료와 정보 공유 등의 협력을 확인하며 한국 정부가 역사화해 기금이나 재단을 설립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이다. 피해자 구제를 위해 설립되는 기금이나 재단에 일본 정부나 기업,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면 양국 국민 사이에 가로놓인 마음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화해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의 지정학적 요인에 더해 격화하고 있는 미·중 갈등 상황을 고려하면, 양국이 공유해야 할 ‘전략적 이익’과 미래 비전을 협의하고 양국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양국 지도자에게 부여된 책무이며, 그래야 화해와 미래지향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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