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썩은 살을 도려내야 경제가 산다

2020-07-06 13:20
  • 글자크기 설정

조선‧해운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2016년 1분기 은행권 부실채권 규모는 31조원 이상 쌓였다.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이었다.

농협은행은 STX조선해양과 창명해운 등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으로 관련 대출채권이 대거 부실화해 1조2401억원이나 되는 손실을 떠안았고,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과 시중은행들의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회생 기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 돈을 쏟아부으면서 생명을 연장시켜준 잘못된 정책의 결과였다. 당시 수조원의 리스크를 떠안은 은행들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로, 빚으로 연명하는 이른바 ‘좀비기업’에 대한 이슈가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조선‧해운 구조조정 사태 때처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재정지원이 우리 경제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우선 살리고 보자”는 정부의 정책에 끊임없는 유동성이 공급되고 있지만, 언제 우리 경제의 부실 뇌관이 될지 모른다.

기간산업안정기금, 채권안정펀드, 긴급대출 등 ‘100조원+α’의 역대급 재정 정책에 기업의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실제로 올해 기업대출은 빠르게 늘고 있다. 시중 5대 은행의 대기업대출 잔액은 총 89조원가량으로 작년 말보다 17조원가량 많아졌다. 2018년 말부터 지난해 6월 말까지 반년 증가 폭이 6775억원인 것과 대조적이다.

중소기업 대출은 무려 30조원 가까이 늘었다. 올해 1월과 2월에는 전월 말 대비 증가 폭이 2조∼3조원대였지만 3월에는 약 5조4000억원, 4월에는 8조4000억원, 5월에는 7조4000억원 증가했다.

연체율이 급격히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큰 문제다. 대규모 재정지원이 이뤄지면서 상반기 기업의 연체율은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지만, 경기 불황이 장기화되고 유동성 공급이 한계에 달했을 때 기업의 리스크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실물경제에서 금융으로 리스크가 전이되고 있어, 은행들이 대출 문턱을 높이면 기업의 연쇄부도는 불가피한 상황이 된다.

이미 기업의 부실 징후는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 지난해 기업들의 경영여건이 악화되면서 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는 한계기업, 즉 ‘좀비기업’ 비중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특히 기업들의 매출액 증가율이 4년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부채비율은 갈수록 높아지는 가운데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기업 부실이 급증할 것으로 우려된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2020년 상반기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충격이 연중 내내 지속될 경우 기업들은 최대 54조원의 유동성 부족을 겪고, 절반 이상(50.5%)의 기업은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을 정도로 재무건전성이 악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항공업은 약 13조원의 유동성 부족이 예상되고 숙박음식, 여가서비스, 해운 등도 유동성 부족에 시달릴 것으로 전망됐다.

문제는 금융당국과 채권은행 모두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정권은 내심 사회적 고통이 따르는 구조조정을 반길 리 없다. 일단 부실기업 옥석가리기를 통해 구조조정에 나서겠다고 공언은 하지만 이미 정치권의 유무형의 압력에 이를 관철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채 폭탄’은 생각지도 못한 채 무조건적인 재정 지원만 주문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는 2008년 금융위기보다 더욱 혹독하고 고통스러웠던 시절이지만 ‘축복된 재앙’으로도 불린다. 비록 미완(未完)에 그쳤지만 위기를 동력 삼아 구조조정을 밀어붙여 경제가 일정부분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 구조조정이 제대로 추진돼야만 효율적 자본 배분이 이뤄지고, 이를 통해 우리 경제가 한 단계 성숙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좀비기업과의 전쟁, 위기를 지렛대로 삼기 위해 금융당국을 넘어 정권 차원에서 명운을 걸 일이다.

최근 몇년 동안 정치적 포퓰리즘과 저금리 기조에 편승해 빚으로 연명해 온 기업은 계속해 늘어났다. 내년이면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포퓰리즘으로 인해 좀비기업 청산의 칼을 꺼내들지 못할 수도 있다.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과감한 수술 없이 산소호흡기를 대는 데 그치는 지금과 같은 우유부단한 부실기업 정리 방식으로는 경제회복도, 경제생태계의 복원도 모두 신기루일 뿐이다. 결정을 미루다 사후약방문 격 처방을 했을 땐, 우리 경제가 심각한 치명상을 입고 난 후일 것이다.

썩은 살을 미리 도려내야 경제가 살 수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