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과 베트남민족은 기원전 108년과 111년에 각각 한(漢) 무제의 침략을 당해 지배를 받았고,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다. 두 민족의 교류역사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공민왕 때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제(順帝)의 미움을 사서 교지(交趾: 베트남의 옛 이름)로 3년간 귀양을 갔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익점 선생은 교지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교지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지고 되었고, 귀국할 때는 교지에서 목화씨앗을 가지고 귀국해서 목화재배와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목화가 한반도에 널리 보급됨으로 해서 일반 백성들의 의복이 무명옷으로 바뀌게 되었고, 왕족과 귀족 권문세가 사람들만이 입고 덮던 솜옷과 솜이불이 일반 백성들에게도 보급되게 된 것이다. 후일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적을 “일반 백성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씨와 같다”고 높이 평가할 만큼, 목화 보급은 한민족 복식사에 대전환을 이루게 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문익점 선생은 명주, 모시, 삼베, 칡넝쿨로 옷을 해 입던 한민족에 무명옷을 널리 입도록 하여 추위를 면하게 한 인물이다. 이러한 기록은 충숙공 삼우당 실기(實記)에 전해져 온다.
◼강성(江城) 문씨 시조 - 문익점
◼ 원나라 황제의 명을 어겨 교지로 귀양
◼ 교지에서 목화씨를 가지고 귀국
교지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문익점 선생은 1366년 황제의 용서를 받아, 그 해 9월에 연경으로 출발하였다. 원나라 황제의 윤허로 귀양길에서 풀려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밭 가운데 가득 피어있는 백설 같은 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따르고 있던 김룡(金龍)으로 하여금 꽃을 따오도록 하였다. 이에, 한 노파가 다급한 소리로 와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엄히 금하는 꽃을 누가 감히 따는가? 관에서 알면 벌을 받는다며 목화송이를 빼앗아 갔다. 하지만 문익점 선생이 워낙 의연하게 행동을 하니 모름지기 관에 수색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며 꽃을 되돌려주었다, 12월에 연경에 당도하니 황제가 예부시랑(禮部侍郞)과 어사대부(御使大夫)의 벼슬을 주었다. 1367년 정월에 37세인 문익점은 황제에게 여러 번 본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황제는 공에게 큰 벼슬을 주고 높이 쓰려고 불허하였다. 이에, 연로한 부모가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음을 지성으로 말함에, 황제는 귀국을 허락하고 말과 황금을 주어 예우를 하였다. 2월에 고려 땅을 다시 밟으니 햇수로 5년 만에 고향을 찾아 부모를 만난 것이다. 귀양을 갔다가 교지에서 가지고 온 목화씨앗을 붓두껍 속에 숨겨 가지고 들어오는 데 성공한 선생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를 재배하였다. 목화 재배기술을 몰라 겨우 한 그루만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을 3년여의 노력 끝에 드디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 곳곳에 목화씨를 보급하였다. 선생의 손자 문래(文萊)는 목화에서 실을 뽑는 수레를 만들어 문래(文萊)라고 이름하고, 문영(文英)은 베짜는 방법을 만들어 문영(文英)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음(訛音)되어 물레가 되었고, 물레에서 실을 뽑아 천을 짠 것을 무명이라고 하였다. 문씨 가문은 한민족의 복식사를 새로 쓴 획기적인 공적을 남긴 위대한 가문이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 선생과 장인 정천익이 목화를 처음으로 재배한 터인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 불사이군의 절개로 낙향
문익점 선생은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 혁명 세력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오로지 유학의 발전에 헌신하였다. 고려가 망하는 시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의리와 절개를 지킨 대유학자로, 사망한 다음 조선왕조에서는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해졌고, 1440년 세종 때에는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봉해져 강성(江城) 문씨의 중시조가 되었고, 세조는 사당을 지어 모시라하고, 도천사(道川祠)를 사액(賜額)하였다. 정조는 도천사에 사액하여 도천서원(道川書院)으로 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도천서원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다.
충선공 문익점은 불사이군으로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받아 교지로 유배되었고, 조선 왕조에서는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선생의 공적은 조선왕조 내내 칭송받았고, 선생의 충의와 높은 절개는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조선왕조 세종 때부터 목화로 만든 면포는 백성을 추위로부터 구하고, 나라의 경제와 세금을 거두는 데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으니, 목화를 보급한 문익점 선생의 업적은 한민족사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공적이다, 사료가 멸실되어 교지에서 3년간의 유배생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한국과 베트남 관계의 역사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충숙공은 문익점 선생의 선조 문극겸(文克謙)의 시호이다.
자료출처: 충숙공 삼우당 실기(忠肅公 三憂堂 實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