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엔 언제나 생명과 젊음의 춤이 넘쳐흐른다.

2020-03-06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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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지중해 오디세이' 14

 
 
 
    

[파랑돌을 추는 사람들]

 


[지중해 오디세이 14] 지중해의 춤
카잔차키스의 크레타, 카뮈의 알제, 고흐의 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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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에 가서 춤 구경 해 볼 생각하신 적 있나요? 지중해에는 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스에는 마을마다 섬마다 자기네 춤이 있어 4000종류나 된다고 하네요.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남부의 지중해 사람들도 자기네 춤을 즐긴답니다. 그리스와 인접한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에도 다양한 민속춤이 있는 건 물론이고요.

지중해에 가면 꼭 춤 구경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카뮈의 <알제의 여름>을 읽고 생겨났습니다. 춤추는 모습을 묘사한 두 사람의 글에 생명의 힘, 젊음의 아름다움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지요. 영화에서 ‘20세기의 성격배우’ 안소니 퀸(1915~2001)이 연기한 조르바는 여러 번 춤을 추지만, 특히 큰돈벌이가 될 거라고 기대하고 온갖 노력을 쏟아 부운 광산사업이 한순간에 실패로 돌아간 후 숨을 몰아쉬며 펄쩍펄쩍 춤추는 마지막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광산 아래 크레타 섬 해변 모래밭에서 펼쳐진 조르바의 춤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아직 희망은 있다”라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암시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조르바의 춤보다는 카잔차키스의 소설 중간, 부활절 마을 축제 장면에 나오는 크레타 섬 양치기 청년의 춤이 더 인상적입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춤을 추는 청년의 표정과 춤동작이 영화 속 조르바의 춤보다 더 생생하고 활기차며 젊음과 생명,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관능까지 넘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좀 길지만 카잔차키스가 써놓은 걸 옮겨보겠습니다.

<포플러 아래서 부활절 축제의 춤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춤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키가 크고 피부 빛이 가무잡잡한 스무 살가량의 청년이었다. (생략) 열린 셔츠 깃 사이로 까만 가슴이 내보였다. 가슴은 곱슬곱슬한 털로 덮여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날개처럼 두 다리로 땅을 차면서 그는 이따금 어떤 처녀에게 눈길을 던지는데 …. “춤을 이끌고 있는 저 젊은이가 누굽니까?” 내가 물었다. 아나그노스티 영감은 한차례 웃고는 대답했다. “저 녀석은 영혼을 앗아가는 천사장 같은 녀석이에요. 양치기 사파카스예요. 1년 내내 산과 들을 돌며 양을 치다가 부활절이 되면 내려와서 사람도 만나고 춤도 춥니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내게도 저런 젊음이 있다면! 내게도 저런 젊음이 있다면, 젠장, 콘스탄티노플도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겠는데!” 젊은이가 고개들 흔들면서 사람의 소리가 아닌, 발정한 숫양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순간순간 죽음이 죽고 다시 태어났다. 삶이 그러하듯이. 수천 년 동안, 선남선녀들은 봄 나무의 신록 아래에서(포플러 나무 밑에서, 전나무 밑에서, 떡갈나무, 참나무, 플라타너스, 키다리 종려나무 밑에서) 춤을 추어 왔고, 또 그렇게 수천 년을 욕망에 사로잡힌 얼굴로 춤을 출 것이다. 얼굴들은 바뀌고 바스라지고 흙으로 돌아가도, 다른 얼굴들이 나타나 그 자리를 대신 할 것이다. 거기, 춤추는 자는 오직 하나다. 다만, 천 개의 가면이 있을 뿐이다. 그는 영원히 스물 살이다. 그는 죽지 않는다.>

어떻습니까? 생명과 젊음, 그리고 관능과 욕망의 냄새가 물씬하지 않습니까? 양치기 사파카스의 춤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중요한 등장인물인 젊은 과부가 마을사람들의 칼에 목이 배어 죽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끝납니다. “순간순간 죽음이 죽고 다시 태어났다. 삶이 그러하듯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카잔차키스는 스물한 살 청년의 춤과 과부의 죽음으로 나타내 보이려 한 것 같습니다.
짧은 수필 <알제의 여름>에서 카뮈는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사람들이 먹고 입을 것은 부족해도 지중해의 태양과 바다를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자신 가난했지만 치열히 살았던 카뮈의 글이기에 그 모습이 진실하게 다가오는데, 알제의 가난한 청춘들이 댄스홀에서 춤추는 걸 멀리서 보고 쓴 장면에서도 그런 느낌을 진하게 받습니다.

<파도바니의 해변에서는 매일같이 댄스홀이 문을 연다. 그 긴긴 해안으로 온통 다 활짝 열려 있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상자 속에서 동네의 가난한 젊은이들은 해가 저물도록 춤을 춘다. (생략) 홀은 하늘과 바다라는 이중의 조개껍질 모양으로 싸이게 됨에 따라 기이한 초록빛 광채로 가득 찬다. 창문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면 오직 하늘만이 보이고 차례차례로 지나가는 춤추는 사람들의 얼굴이 까만 윤곽으로 떠오른다. 초록색 배경 위로 검은 프로필들이 마치 축음기의 회전판 위에 오려 붙인 실루엣 그림처럼 빙글빙글 돌아간다. 밤이 순식간에 오고 그와 함께 불빛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 미묘한 순간 속에서 내가 맛보게 되는 저 열광과 비밀스러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오후 동안 줄곧 춤을 추고 있던 그 기막히게 멋진 키 큰 처녀는 기억난다. 그 여자는 허리께에서 다리에까지 땀으로 착 달라붙은 푸른빛 옷 위에 재스민 꽃목걸이를 달고 있었다. 그는 춤을 추고 있는 동안 깔깔대고 웃으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곤 했다. 그 여자가 탁자들 옆으로 춤추며 지나가고 나면 꽃 냄새와 살 냄새가 한데 섞인 냄새가 뒤에 남았다. 저녁이 되자 남자 파트너의 몸에 찰싹 붙이고 있는 그의 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재스민과 검은 머리가 서로 교차하는 반점들만이 빙빙 돌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여자가 팽창된 목을 뒤로 젖힐 때면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남자 파트너의 프로필이 돌연 앞으로 수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무구(無垢)함에 대하여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이 같은 저녁에 얻은 것이다. 치열함으로 가득한 이런 사람들을 그들의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저 하늘과 떼어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배운다.> 꽃 냄새와 살 냄새가 섞인 땀 냄새! 지중해 사람들 삶의 냄새일 겁니다.

지중해에서 보고 싶은 또 다른 춤은 ‘파랑돌(Farandole)’입니다. 이 춤은 오페라 카르멘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1838~1875)의 모음곡 ‘아를의 여인’으로 알게 됐습니다. 아를(Arles)은 남 프랑스, 프로방스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덕분에 프로방스를 찾는 많은 한국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끄는 곳이지요. 고흐는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부터 여기에 살면서, 쳐다볼수록 몽롱해져 넋이 빠지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비롯 무려 3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를은 지중해와도 가까워 고흐는 여기서 40㎞ 떨어진 ‘상트 마리’라는 해변 마을에서 지중해 바다 그림도 몇 점 남겼습니다. 파란 바다 위에 떠 있는 어선과 수영하러 나온 사람들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다 아름답고 그윽합니다. 아를 부근에는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이 그림을 그리던 곳과 미술관들도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분들이나 그림 구경 좋아하는 분들은 꼭 가봤으면 하는 곳들이지요.

‘아를의 여인’은 원래 아를 부근 님(Nimes)에서 태어난 알퐁스 도데(1840~1897)가 쓴 짧은 희곡입니다. 아를에서 좀 떨어진 작은 마을 농부인 주인공 청년이 아를에서 한번 본 도시풍의 여인에게 반해 결혼하려 했으나 이 여인의 ‘정숙하지 못한 과거’를 알게 된 부모의 반대에 절망, 스스로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비제는 도데가 희곡을 다 쓴 후 연극에 쓸 음악을 부탁하자 희곡 내용에 맞춰 27곡을 작곡했습니다. 그중 한 곡이 프로방스의 민속음악 멜로디를 차용한 춤곡 파랑돌인데요, 주인공 청년은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아를의 그 여인을 잊은 척합니다. 그 여인에게 빠져 만사에 의욕을 잃고 내팽개쳤던 농사일을 다시 열심히 하는 한편 마을 축제에서는 양 옆 사람 손을 맞잡거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빙빙 돌아가는 파랑돌 춤을 가운데에서 이끌기도 하면서 정신을 차린 척합니다. 결국에는 목숨을 버리게 되지만 ….

도데의 ‘아를의 여인’에도 그의 다른 작품인 ‘별’, ‘마지막 수업’처럼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넘칩니다. 하지만 연극은 줄거리가 단순해서인지 별로 공연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반복되는 멜로디가 단순하고 재미있고 힘이 넘쳐 두어 번 들으면 저절로 따라하게 되는 파랑돌과 또 다른 춤곡인 ‘미뉴에트’가 들어있는 비제의 모음곡 ‘아를의 여인’만 유명해졌습니다.

‘비제의 파랑돌’을 검색하니 사진과 그림이 많습니다. 축제를 맞아 수수하지만 깔끔하게 차려 입은 아를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즐겁고 흥겹게 춤추고 있습니다. 특히 서로 사랑하는 젊은 남녀의 표정과 춤동작이 예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림에서는 비제의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비제의 음악에서는 그림 속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이 떠오르고요. 음악과 문학과 그림을 다 사랑하는 듯 어떤 분은 자기 블로그에 도데의 ‘아를의 여인’ 줄거리를 옮겨 쓰면서 사이사이에 고흐가 그린 것 등 아를의 풍경과 아를 사람 그림을 여러 장 삽입해놓았습니다. 내 소박하고 단순한 느낌으로는 고흐가 도데의 희곡을 읽고서 그렸던지, 도데가 고흐의 그림을 보고 희곡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파랑돌과 조르바의 춤은 먼 친척 간이라고 합니다. 유럽의 민속을 연구한 한 영국학자에 따르면 지중해 춤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의 민속춤입니다. 옛날부터 그리스 사람들은 결혼식이나 세례식, 아기의 출생이나 명명일(이름을 지어주는 날)처럼 즐거운 날에는 모두 모여 둥글게 돌면서 춤추며 축하하고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다는 건데, 도시국가들로서 잦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요. 고대 그리스의 민속춤은 그리스 문명과 함께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돼 남 프랑스 즉 프로방스와 스페인의 남쪽인 카탈루니아에서는 파랑돌로,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타란텔라라는 민속춤으로 남게 됐다고 합니다. 대서양 지역인 프랑스 서쪽 브르타뉴 지방의 민속춤인 가보테도 둥글게 돌면서 추는 윤무(輪舞)라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거라고 짐작됩니다. 이탈리아의 타란텔라는 타란토라는 지역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타란툴라라는 독거미에 물린 사람의 몸부림을 흉내 낸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거미에 물린 사람들이 미친 듯 날뛰는 모습과 타란텔라의 격하고 거친 춤동작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비제가 파랑돌을 작곡하기 전인 1792년 프랑스 혁명 때 혁명군(시민군)들은 ‘카르마뇰(Carmagnole)’이라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서 승리를 다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노래의 멜로디와 춤은 모두 파랑돌의 변형이라고 하네요. 공동체, 같은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모양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강강수월래를 췄던 것처럼 말입니다.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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