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오디세이 13> 보스포루스 해협, 이스탄불
페리 보트의 고동 소리에는 비애 가득하지만
이스탄불 사람들의 혼과 힘이 비롯되는 보스포루스
보스포루스! 지중해의 동쪽 끝, 터키의 고도(古都) 이스탄불을 동서로, 아시아와 유럽으로 가르는 보스포루스. 길이 31㎞, 폭 750m~3.7㎞의 좁은 해협. 이 해협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입니다. 해협은 북쪽 흑해에서 실어온 물을 빠른 물살에 실어 남쪽 마르마라 해를 거쳐 그리스를 감싸고 있는 에게 해에 풀어놓습니다. 에게 해로 흘러 들어간 흑해의 물은 지중해 서쪽 입구, 지브롤터로 들어오는 대서양 바닷물과 함께 매순간 뜨거운 햇볕에 증발하는 지중해를 채웁니다.
요즘에야 쉽게들 가는 터키 여행이고 이스탄불 관광이지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기대 속에서 이곳을 지나간 예전 분들은 감회가 깊었던 모양입니다.
“비행기가 보스포루스 상공을 지날 무렵, 스튜어디스에게 샴페인 한잔을 청해, 마침내 유럽으로 들어온 것을 창밖을 내다보며 자축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사이에 끼고 파도치는 보스포루스 해안의 장엄한 낙조를 바라보면서 나는 고별인사를 하였다. 아시아여 안녕! 동양과 서양이 마주치는, 이스탄불이라는 그 상징적인 도시에서 나는 다시 한번 여장을 꾸렸다. 이제부터 정말 유럽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앞에 글은 어릴 때부터 유럽여행을 꿈꿨던 어떤 분이 그 꿈을 이뤄 마침내 유럽으로 가게 됐을 때 비행기가 아시아를 지나 유럽 상공으로 진입하자 그 감회를 훗날 자기 회고록(그분의 이름과 직업, 책 제목도 오래 돼서 기억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에 쓴 것이고, 두 번째 글은 이어령 선생이 30대 초반에 첫 해외여행을 마친 후 써낸 <바람이 불어오는 곳> 앞부분에 나옵니다. 둘 다 아득한 옛날이야기입니다.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50~60년 전 이야기입니다. 유럽을 가려면 김포비행장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로 일본에 가서 외국 항공사 비행기로 갈아타야만 했던 때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었던 어릴 때부터 보스포루스는 익숙한 지명이었습니다. 설렘이 사라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 설렘을 안고 보스포루스를 더듬어 볼 생각입니다. 보스포루스 해변도로에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아시아와 유럽을 왕복하는” 페리선의 뱃고동 소리와 갈매기 소리를 듣고, 페리에서는 멀리 또는 가까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소피아 성당, 톱카피 궁전, 갈라타 다리 등 이곳의 지나간 영광과 퇴락을 담고 있는 곳들을 바라볼 겁니다.
이 해협 터키어 이름은 ‘보가지(Bogazi)’입니다. ‘목구멍’이라는 뜻입니다. 이곳만 틀어쥐면, 이곳의 뱃길만 장악하면 많은 것을 얻었으니 이름이 그렇게 됐나봅니다. 처음 도시가 들어선 기원전 7세기 이후 보가지를 장악하기 위해 세력과 세력이, 문명과 문명이 충돌했고, 새로운 세력, 새로운 문명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말 ‘모가지’가 연상되는 보가지라는 이름이 너무 직설적이었나, 보가지는 그리스 신화에서 시작된 이름 ‘보스포루스’에 밀려났습니다. 보스포루스(Bosphorus)의 ‘보스’는 가축, ‘포루스’는 지나간 곳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가축은 소입니다. 신들의 왕이자 언제나 바람기를 주체 못하던 제우스가 이번에는 ‘이오’라는 아름답고 싱싱한 처녀를 집적입니다. 제우스의 본처 헤라는 또 분노가 치솟았고, 제우스는 헤라가 이오를 해코지할까봐 작은 암소로 변신시킵니다. 암소는 헤라의 분노를 피해 이 해협까지 도망왔지만 헤라는 등에 떼를 보내 이오를 물어뜯어 죽도록 가렵게 만듭니다. 이오는 서쪽으로 다시 달아나다가 에게 해에 빠집니다.
보스포루스의 전설을 뒤지다가 이스탄불의 어원도 알게 됐습니다. “도시로(To the City)”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보스포루스 일대는 예전부터 대처였던 것이지요. 터키에 왠 그리스 이름이냐고요? 아주 예전에는 터키와 그리스에는 구분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있었다는 트로이전쟁의 무대가 터키였고, 그리스 철학자로 교과서에 소개된 탈레스와 디오게네스도 터키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터키와 이스탄불 여행기나 관광안내서는 대부분 이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역사가 오래인 만큼 볼거리도 많고, 땅이 기름지고 넓어서 먹으며 즐길 것도 많다는 이야기도 곁들어서요. 하지만 이스탄불에서 보스포루스를 탐색할 때는 이스탄불 출신인 오르한 파묵(1952~ , 2006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의 ‘자전적 회상기’ <이스탄불>(이난아 역, 민음사)을 읽는 게 여행의 맛을 깊게 하지 싶습니다. 그리스에 갈 때 바이런 시집을, 크레타에 갈 때 <그리스인 조르바>를, 알제리를 여행할 때 카뮈의 <결혼·여름>을,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를 여행할 때는 고흐의 편지들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가보지 않아도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의 속살, 속마음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알게 되면 그곳에 더 가고 싶도록 만드는 책일 겁니다.
파묵이 전하는 보스포루스의 속살, 속마음은 ‘비애’입니다. 파묵은 아버지와 삼촌의 사업 실패로 점점 기울어져 가는 집안-예전에는 매우 큰 부자였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6세기 중엽, 이스탄불을 근거지로 삼고 유럽을 위협했던 대제국 오스만 터키가 근세에 이르러 영국 등 서유럽 세력과 북쪽 러시아의 발호로 점차 쇠락해온 역사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합니다.
이스탄불 시내 고급 주택가에서 살았던 파묵은 어릴 때 어머니, 형과 함께 보스포루스 해변으로 자주 바람을 쐬러 갔습니다. 기울어진 가세,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우울한 어머니의 속도 모르고 탁 트인 바닷가에서 놀고 투정하고 형과 다투던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머니를 따라 전차를 타고 종점인 베벡의 해안가에서 한동안 산책을 한 후, 매일 같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공의 배에 올랐다. 나는 베벡의 후미에서 카누를 타고, 나룻배, 작은 외돛배, 페리보트, 가장자리가 조개로 뒤덮여 있는 부표(浮標), 그리고 등대 사이를 지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먼 바다로 나가서 보스포루스의 급류의 힘을 느끼고, 지나가는 배가 일으키는 물결로 우리가 탄 나룻배가 흔들리는 것이 재미있었고, 이 뱃놀이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배 위에서 보스포루스 주변의 이스탄불을 쳐다보는 어린 파묵의 눈에는 이스탄불의 사람들, 그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답거나 지저분한 풍경들, 햇볕과 바람이 모두 들어옵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 중에서 “해안 도로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고 단지 바다에서만 볼 수 있는 정원 속의 저택들”에 이끌립니다. 보스포루스와 파묵의 비애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오스만 터키의 최고 귀족과 관료들의 여름 별장들이었던 이 저택들은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터키가 패망한 이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썩고 부서지고 불에 탄 채 허물어져 물에 잠기고 있습니다.
“해안가 저택의 멋진 철문, 여전히 건재하는 이끼가 낀 두껍고 높은 벽,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창문 덧문, 목공 기술, 혹은 해안 저택들 뒤에 있는 높은 언덕까지 펼쳐져 있으며 유다 나무, 소나무, 100년 된 플라타너스로 뒤덮인 어둠 속 정원들을 보고는 시대를 마감하고 남긴 휘황찬란한 문명의 흔적들을 감지하곤 했다. 한때는 우리를 약간 닮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그 시기가 지나갔으며, 우리는 그 사람들과는 약간 더 다른-그들보다 더 가난하고, 더 상처 입고, 더 의기소침하고, 더 시골 사람들 같은-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보스포루스의 한 선착장 바로 옆에 내려서는 “절반은 돌길이며 절반은 인도이고, 작은 찻집이 있는 어떤 곳을 가리키며” 두 아들에게 “옛날에 여기에 목조 해안 저택이 있었단다. 내가 어린 소녀였을 때 너희들 할아버지는 여름마다 이곳으로 우리를 데려왔단다”라며 좋았던 옛날 속에 빠집니다.
파묵은 자신이 느낀 비애의 감정을 ‘멜랑콜리’라는 단어에 집약하고, 멜랑콜리는 ‘상실-주로 정신적인 상실’에서 비롯된 감정이라며, 이 책 한 장(章)에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길게 설명합니다. 파묵이 2015년에 낸 <순수박물관>도 이런 멜랑콜리가 저변에 깔린 소설입니다. 사랑했던 여인을 잊지 못해 그 여인과의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함께 피우던 담배꽁초, 성냥갑, 그 여인의 머리핀, 화장품 병, 단추, 옷, 편지 등등을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를 헤매고 뒤지며 찾아 모아 박물관을 만든다는 줄거리는 상실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내지 못할 것이지요. 섹스 장면이 몇 차례 묘사되지만 이때도 엑스터시보다는 멜랑콜리가 더 진합니다. 엑스터시, 성의 열락보다는 성의 슬픔이 더 스며든다고 해야 할 것 같군요.
파묵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도시(이스탄불)가 패배, 파괴, 좌절, 침울, 빈곤으로 은밀히 썩고 있는 반면, 보스포루스는 삶에 대한 애착, 흥분, 행복감으로 내 머릿속에서 깊이 합치되었다. 이스탄불의 혼과 힘은 보스포루스에서 비롯된다.” 개인 모두는 비애를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공동체의 비애는 아니다“라는 말도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슬퍼도 사람은 살아간다는 뜻인가 싶습니다.
파묵을 따라 보스포루스를 돌아본 후 해야 할 일이 몇 개 더 있습니다. ‘터키 과자’를 곁들여 ‘터키 커피’를 마시며 터키 사람들은 왜 친절한가를 생각해보는 겁니다. “한 세대에 걸쳐 세계 125개국을 돌아다녔다”는 한국 출신 국제 컨설턴트 한 분은 “인간의 품격과 예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특별하고도 순수한 나라, 사람이 아름다운 나라가 터키”라고 자신의 여행기에 썼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품격,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시되는 곳까지 가서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지 않지만 반대로 인간의 품격과 예의에 근거한 나름대로의 눈높이로 만든 가보고 싶은 나라도 있다. 그 리스트 최상단에는 터키가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 ”손님은 알라신이 보낸 선물“이라는 가르침이 있다지만 그 걸로는 부족한 설명입니다.
‘터키 과자’는 젤리나 전분에 잘게 부순 대추야자, 호두, 피스타치오 같은 것을 섞어 만듭니다. 얼마나 맛있기에 ‘로쿰(Lokum)’이라는 터키 이름에 ‘터키의 기쁨(Turkish Delight)’이라는 영어 별명이 붙게 됐는지 궁금하고, 오늘날 세계의 커피 문화는 오스만 터키의 궁전에서 시작돼 유럽으로 번져나간 결과라고 하니 궁금한 겁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파묵의 멜랑콜리와 이것들이 관계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것인지, 그 대답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