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건설은 그룹해체 이후에도 ‘대우’라는 사명을 지켜오고 있다. 대우건설은 부실한 재정 탓에 2000년 이후 세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국내외 시장에서 대우건설의 브랜드파워는 여전하다.
대우건설이 명맥을 이어올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고 김 전 회장이 구축해 놓은 해외건설시장에서의 인지도 덕분이라는 게 업계의 주된 평가다. 아프리카, 남미 등 해외 건설시장을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어서다.
고 김 전 회장은 당시 종합상사 부문 중심이었던 대우가 해외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위해선 건설업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우건설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동작대교 건설, 서울지하철 2호선, 88올림픽도로 등 국내 대형공사를 연이어 수주했다.
국내에서의 활발한 공사를 토대로 설립 3년만에 해외건설업 면허를 취득, 1976년 에콰도르 키토시 도로포장공사 수주로 국내 건설사 중 처음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했다.
사회주의국가였던 리비아와 나이지리아를 전략지역으로 정하고 신시장 개척에 나섰다. 리비아, 나이지리아, 알제리 등과는 아직 국교도 맺어지기 전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곳에 눈을 돌리며 그의 개척자 기질을 발휘한 것이다.
대우는 당시 이탈리아 건설사가 공사하다 포기하고 떠난 리비아 우조비행장 건설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당시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의 신뢰를 얻은 이후 주택·병원·호텔·도로·플랜트·항만 등 114억달러어치 공사 200여건을 모조리 수주하며 주목받았다.
이어 수단 등 불모지로 꼽히던 아프리카 시장에도 진출하며 해외건설시장 개척자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당시 건설 붐이 일던 중동시장에서도 연이은 수주고를 올렸다.
1978년 우물사업을 통해 진출한 나이지리아에선 지난 9월 액화천연가스(LNG) 생산플랜트의 설계·구매·시공(EPC) 원청 우선협상 대상자 지위를 인정받으며 국내기업 최초로 LNG플랜트 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대우건설은 70개의 공사를 수행하며 이 부분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지난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하면서 계열분리, 워크아웃을 거치며 위기를 겪었다. 2001년 3월 한국자산관리공사에 인수된 대우건설은 주택브랜드 '푸르지오'를 통해 다시 일어섰다. 2003년에는 4년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워크아웃 졸업 후 2006년 금호아시아나 컨소시엄이 대우건설 지분 72.1%를 6조6000억원에 인수하면서 새로운 주인이 됐다.
당시 최대주주인 금호산업은 자산규모 2조원을 제외한 나머지를 차입금에 의존했고,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무너졌다.
1996년에는 베트남 북서쪽에 여의도 면적의 3분의 2에 이르는 207만6000㎡ 면적의 신도시를 조성하는 사업을 계획했다. 이 사업은 글로벌위기 등을 겪으며 미뤄졌지만 현재 대우건설이 ‘스타레이크’ 신도시 개발 사업으로 명명하고 진행 중이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대우건설은 그룹 부도 후 워크아웃 등을 거치면서도 국내 시공능력평가 5위권을 유지하는 저력을 보였다”며 “고 김 전 회장의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통해 닦아놓은 유산이 아직까지도 대우건설을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