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신혁당-임정....공화정치에 눈뜨다

2019-12-0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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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동력은 공화, 민족주의에 바탕한 애국심의 궐기

 

조선민족대동단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사진=구글이미지]

1920년1월1일 상하이에서 열린 임정요인인들의 신년축하회. 대한민국2년원단이란 설명이 들어있다.[사진=구글이미지]

[김세원의 천방지축] 지난주 열린 조선민족대동단 결성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조선민족 대동단 100주년, 한국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다’의 전체 진행을 맡은 것은 행운이었다. 현장에서 세 분 전문가의 발표와 세 분 교수들의 토론을 들으면서 번개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 근대 정치사상사에서 3·1운동은 거대한 용광로와 같았다. 1919년이면 주권을 뺏긴 지 10년 세월이 흘렀고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 러시아에 최초의 공산정권이 들어선 지 1년이 넘은 시점이다. 사상의 소용돌이에서 주류는 민족주의였고 공화주의와 왕정복고를 추구하는 복벽(復辟)주의가 경쟁했으며 자본주의 사조와 함께 일본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로 보고 이에 실망한 사회주의 사조도 싹을 틔웠다.

명색이 순국선열의 후손으로서 3·1운동 관련 특강을 하고 중국과 연해주의 항일운동사적지를 다섯 차례나 방문했음에도 항일 독립운동사를 운동의 전개 과정과 진압의 잔혹사로만 바라보았던 것이 부끄러웠다. 구한말 선각자들은 여러 단체를 결성하고 일제에 의해 해산당하기를 거듭하면서도 치열한 학습과 논의를 통해 독립과 근대화를 병행 추진하였다. 관련자료를 찾아 읽으면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운동의 목표를 단순한 자주독립에 둔 것이 아니라 독립 후의 국가형태와 정치체제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종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구한말의 사회단체들이 초기에는 전제군주제를 대신할 만한 국가 형태로 입헌군주제를 생각했다가 나중에 민주공화정 수립으로 발전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전제군주제에 대한 도전-만민공동회와 헌정연구회

서희경 서강대 교수는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연원: 민주공화와 균등 이념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구한말에 논의되는 민주공화는 군주전제의 반대 개념, 전제 또는 자의적 통치를 배제하는 정체(政體)로서 통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한국 역사에서 주권재민의 원리와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은 1880년대의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에서 개진되었으며 하나의 정치적 이념으로 수용되어 정치 행위로 나타난 것은 만민공동회와 3·1운동이었다“고 말한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 초기인 1898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 동안 정부와 합의한 중추원 개편안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만민공동회는 민회를 통해 공론을 형성하고 이를 국정에 반영하고자 했던, 집단상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정치운동이었으나 그들이 추진한 것은 입헌군주제였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이준의 헌정연구회(대한자강회)는 입헌군주제를 바람직한 정치제도로 판단하고 이를 추진하려 했다. 비록 나라는 이미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황제 역시 아무 실권(實權)도 없던 때였지만, 군주제를 폐지한다는 생각은 역모(逆謀)나 다름없었다.

#공화정체의 출발-신민회
안창호는 1907년 신채호 박은식 장지연 등의 대한매일신보 계열과 윤치호 이상재 등의 YMCA와 상동교회 계열, 이동휘 유동열 등 무관계열 등 세 세력을 규합하여 국내에서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신민회는 <대한신민회 통용 장정(규약)>제2장 제1절에서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 체제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신민회는 공화정을 강령으로 채택한 최초의 단체였다. 전국적으로 회원수가 800명에 달했던 신민회 활동은 1911년 9월 일제가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전국의 독립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해 그중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105인 사건’을 계기로 와해됐다.

1915년 3월 이상설(李相卨)·신규식·박은식·유동열·성낙형 등이 참여하여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은 당초에는 폐위된 고종을 중국으로 탈출시켜 망명정부 수립을 추진했으나 탈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1917년 7월 공화제를 골간으로 하는 대동단결선언을 채택했다.
 대동단결선언은 “융희(隆熙) 황제가 삼보(三寶, 영토·인민·주권)를 포기한 8월 29일(1910년의 합병조약 발표일)은, 즉 오인동지(吾人同志)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제권소멸(帝權消滅)의 시(時)가 곧 민권발생(民權發生)의 시(時)요, 구한(舊韓) 최종의 일일(一日)은, 즉 신한(新韓) 최초의 일일(一日)”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고종의 주권 포기는 국민들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이므로 국민들은 당연히 삼보를 계승해 통치할 특권이 있다는 의미다. 대한제국의 주권을 황제로부터 국민이 계승했다는 국민주권론이 탄생한 것이다.

#1919 임정 수립, 민주공화정의 원년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학술회의에서 “3·1운동의 정신 가운데서 가장 의미있는 부분은 ’근대 국가의 발견‘이며 3·1운동이 후대에 던진 첫 번째 의미는 주권 의식의 발견이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3·1운동이 가지는 사상사적 가치는 “군주제에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민국(民國) 정부의 수립에 이상을 제시했고 실제로 임시정부의 조직을 통해 그러한 정신을 구체적 현실로 구현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개화파나 만민공동회, 신민회의 공화주의가 지식인의 가슴에 머물렀다면 3·1운동은 이러한 서면 이데올로기를 실체적 진실로 백성들에게 제시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919년 당시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대한국민의회, 서울에 설립된 한성임시정부, 중국 상하이(上海)에 설립된 임시정부 등 3개의 임시정부가 존재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이들을 통합하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세 단체는 통합임정을 상하이에 두기로 하고 한성임시정부가 상해로 망명한 뒤, 9월 11일 단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개원한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는 첫 안건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후 임시정부 수립 결의와 함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다’를 제1조에 천명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에 담긴 민주공화제 이념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19년 4월 23일 개최된 국내 한성정부 국민대회는 약법 1조에서 국체는 민주제를 채용하고 2조에서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하며 3조에서 국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함 (이하 생략)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9월 11일 제정된 통합임정의 임시 헌법(전문 및 8장 56조) 역시 1조에 국호는 대한민국, 국체(國體)는 민주공화제로 함을 명문화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민국(民國)은 Republic (공화국)의 한자식 표현이다. 국호 자체에서 대한민국이 공화국임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대한은 독립국이고 대한인민이 자유민임을 선언한’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따라 인민주권 및 자유 평등의 원리에 입각한 인민의 권리와 의무도 헌법에 규정됐다.
 
 #애국심의 동력, 민족주의와 공화정

‘사기(史記)’에 의하면 중국 주(周)의 려왕(厲王)이 폭정으로 쫓겨난 뒤 기원전 841년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이 함께 집정(執政)하였는데, 두 사람이 공동으로 화합하여 정무(政務)를 보았다고 해서 이를 ‘공화(共和)’라고 했다. 다수의 참여와 합의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화제(共和制, republic)’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공화제의 사전적 정의는 복수의 주권자가 통치하는 정치체제로 군주제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군주제에서 국가의 원수는 혈통적으로 세습되는 개인이지만, 공화제에서는 선거제도에 의해 국가원수가 일정한 임기로 교체된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공화국을 표방하고 있지만 자유·평등 같은 이념이 현실에서 보장, 실현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민주적 공화국은 국민주권주의, 권력분립주의, 의회주의, 법치주의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지만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은 삼권분립이 지켜지지 않은 채 국가권력이 단일한 특정 권력담당자에 의해 행사되기 때문이다.

1919년 당시 모든 국민들을 결집시키고 동일한 목표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진하게 하는 동력은 애국심이며 이 애국심을 불어넣은 사상적 배경이 공화주의와 민족주의였다는 어느 학자의 지적에 동의한다.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한 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단시일에 이룩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 체제와 ‘우리도 잘살아 보자’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열정이 뒷받침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조선민족 대동단 결성 100주년을 맞아 100년 전 한반도의 상황을 돌아보며 잊혀진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를 다시 생각해본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지금이야말로 방어적·생물학적 민족주의에서 탈피해 고도로 상호 의존적인 현대 국제사회에 걸맞은 글로벌리즘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논설고문·건국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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