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원 인터뷰]박철언 "남북정상회담 몇번이 뭐가 중요해? 비핵화는 더 멀어져"

2019-10-22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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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언 전 장관과 인터뷰하는 김세원 아주경제 논설고문]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1989년 대한민국의 외교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역동적이었고 남북관계는 활발했다. 88 서울올림픽의 여세를 몰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처음으로 2월 1일 공산권국가인 헝가리와 수교했고 유고슬라비아 구소련 불가리아 등 동구권 국가들의 무역사무소가 잇따라 설치됐으며 11월에는 폴란드와 수교했다. 헝가리와의 수교를 기폭제로, 체코 소련 베트남 라오스 중국 등 공산권 38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전방위외교시대를 열었다. 남북관계도 순항하여 판문점에서는 남북적십자회담, 체육회담 등 다방면의 회담이 열렸고 1990년 9월 6일에는 북한의 연형묵 총리일행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헝가리와의 수교 30주년을 맞아 21일 북방정책의 주역이면서 대북밀사로 북한측과 비밀협상을 벌였던 박철언 전 장관을 만났다.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박 전 장관은 팔순이 가까운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활력이 넘쳐 보였다.
-올해 초 헝가리정부로부터 십자공로훈장을 받으셨지요. 동구권 국가중 헝가리를 첫 번째 수교 대상국으로 선택했던 배경이 궁금합니다.

”북방정책은 한국 같은 작은 나라가 북한의 위협과 미 소 중 일 같은 강대국 속에서 최초로 펼친 자주외교였으며 헝가리와의 수교는 첫번째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헝가리를 선택한 이유는 헝가리 민족이 동양계 마쟈르족이라 우리와 정서가 비슷하고 당시 동구권에서 개혁 개방 선두주자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구권에서 소련으로부터 가장 독립적인 위치에 있기도 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암호명 ’푸른다뉴브강‘이었던 헝가리수교작전에 돌입하게 됐습니다.“

-헝가리를 시작으로 1989년11월 폴란드, 1990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1990년 9월 소련, 1992년 중국 등 공산권국가들과의 수교가 차례로 성사되었는데 그중 하이라이트는 역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의 수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당시 동아일보에서 외무부와 통일원을 출입하던 정치부 기자였는데요, 1990년9월3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최호중 외무부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공동성명에 서명했다는 기사를 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동북아시아의 냉전구조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죠. 박장관께서는 한소 수교에도 깊이 관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한소정상회담은 내막적으로는 실패한 회담이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에 경제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하자, 고르바초프대통령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겁니다. 소련 측에서는 그동안 막후 핫라인이었던 박철언의 모습을 볼 수조차 없고,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미수교 상태의 남한대통령이 첫 대면에서 경제지원 문제를 공식적으로 먼저 꺼내는데 자존심이 상했던 겁니다. 이 무렵 저는 일관되게 ‘선수교-후경협’을 주장하다가 YS와의 갈등으로 밀려난 상태였는데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이었던 김종휘라인에서 수교를 위해 30억 달러의 경협을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격노한 노 대통령은 박철언 라인을 활용하여 다시 한소수교를 추진할 것을 지시했고 돌아온 저는 고르바초프와 강력한 경쟁관계에 있었던 옐친 카드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고르바초프는 ‘지는 해’요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옐친은 ‘떠오르는 태양’이었습니다. 저는 1990년 8월 러시아에 가서 옐친 대통령을 서울로 초청했고 오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소련 정보기관을 통해 상부에 보고되었는지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 명의로 9월 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되는 아태평화회의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이 왔습니다. 아태평화회의에 가서 세바르드나제를 만났더니 ‘한국 외무장관에게 이번 가을 유엔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때 직감적으로 옐친이 서울을 방문하고 먼저 수교를 하면 고르바초프가 난처해져서 그런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결국 옐친의 한국 방문 전인 1990년 9월 30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한소 외무장관간에 수교 서명을 하게 되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위험한 시도였습니다.”

-중국과의 오랜 관계를 생각하면 한중수교가 한소수교보다 빠를 것으로 예상됐는데 실제로는 한소수교후 2년뒤에 이루어졌습니다. 1992년 8월 베이징에서 이상옥 당시 외무부장관과 전기침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1949년 이후 43년 간 교류가 단절되었던 중국 대륙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는데요, 한중수교에도 관여하셨지요? .

“1987년 8월 안기부장 특보일 때 아태법률가회의의 고문자격으로 중국을 처음 방문하였습니다. 그후 5년동안 중국 정부의 장차관급 인사, 언론사 간부, 경제계인사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 한중수교의 당위성을 얘기했고 수교를 하는 것이 한국 중국 북한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취지로 북경대학의 교수 학생 1천여 명 앞에서 특강도 했습니다. 정치국 상무위원, 북경시장, 북경 부시장으로 핫라인을 구축해 서신과 전화로 계속 연락을 취했지요. 1991년 7월 체육청소년부장관 때, 같이 테니스와 수영을 하며 친목을 다져온 중국측 인사들이 자신들은 한중수교의 필요성에 공감하지만 북한과 혈맹관계인 혁명 1세대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문제라면서 자기들한테 한 얘기를 그대로 장문의 편지로 써주면 전달하겠다고 했습니다. 등소평, 양상곤, 만리, 강택민, 이붕 총리 등 중국 최고 지도부 5명과 실무를 담당하는 핫라인 세 사람 등 8명을 지정해주었습니다. 제가 정성을 다해 우리말로 쓴 편지를 우리 팀에서 중국어로 번역하고 국전에서 특선한 서예가를 팀에 합류시켜 이를 붓글씨로 옮겼더니 26장이나 되더군요. 이 편지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1991년 9월 유엔총회에서 한중 외무장관회담이 열렸고 두 달 뒤인 11월 13일에 전기침 외무장관이 방한했을 때, 제가 신라호텔에서 두 시간동안 단독회동을 하면서 많은 공감대가 이루어졌습니다. 1992년 8월 수교할 때까지 5년동안의 막후교섭 과정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 장관님은 대북밀사로서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무려 42차례나 북한측과 만나 비밀회담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안기부장 특보였던 1986년 3월, 당시 남북비밀회담 수석대표였던 박철언특보와 북측의 한시해 통일전선부 부부장 사이에 ’88라인‘으로 불리는 직통전화가 설치돼 남북간 주요 문제를 논의하는 채널로 가동되었었지요. 비화도 많았겠습니다.

”1983년 발생한 아웅산폭탄테러사건으로 남북간에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외국투자와 관광객이 대폭 감소하고 군사비 증액 등 양측에서 민족적 역량의 낭비가 엄청났었습니다. 평화공존을 하자는 취지에서 1985년 7월11일 판문점 군사분계선 남측 ’평화의 집‘에서 첫 접촉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내세운 대원칙은 상호주의였습니다. 길게는 3박4일, 짧게는 새벽부터 밤까지 판문점 내 ’평화의 집‘과 북측 ’판문각‘, 개성, 평양, 서울을 오가며 접촉을 가졌습니다. 1989년 7월1일 삼지연의 김일성주석 별장에서 회담을 하고 다음날 남측인사로는 처음으로 북한지역을 통해 백두산 천지에 올랐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북측의 허담 비서와 한시해 부부장일행을 서울로 초청해 명동의 백화점과 남산타워, 동대문· 남대문시장을 보여주었지요. 한번은 북측인사들과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는데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헬리콥터가 뜨지 못해서 백록담에 갇혀있다가 비에 흠뻑 젖은 채 같이 목욕하면서 친분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칠흑같은 새벽에 적십자사 깃발을 단 그라나다차를 타고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지나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위험하지만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5,6공 시절 남북대화가 활발하게 이뤄졌고 1990년 9월6일 북한 연형묵 총리일행이 분단 45년만에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여 노태우대통령과 고위급회담을 가지기도 했습니다만 남북간의 정상회담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책이 아닌가요?

“우리는 정권홍보차원에서 남북문제에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은 평화공존상태를 유지하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지 양측 정상이 사진이나 찍자고 만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국내 정치용 이벤트나 쇼차원에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남북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지만 남북관계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1985년 10월 남북 고향방문단 예술공연단 기자단의 서울-평양 왕래가 이뤄졌고 제가 체육청소년부장관으로 있을 때, 남북한청소년 축구단일팀의 8강 진출, 통일축구팀 평양 방문, 현정화-이분희 남북합동팀이 세계탁구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스포츠교류에서도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1989년 9월11일 노태우대통령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발표, 1991년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타결. 1992년 2월 남북비핵화공동선언 같은 남북관계 개선에 획기적인 사건들이 성사된 것이 모두 6공때 였습니다..”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을 평가한다면 각각 100점 만점에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제가 20년 전에 정치를 떠나 잘 모릅니다만 대북정책을 평가하는 잣대가 정상회담의 개최 횟수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대북정책은 평화공존과 평화통일로 가는 기반 조성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핵심은 우리는 없고 북한은 가지고 있는 핵과 미사일문제의 해결입니다. 현 정부가 2년반동안 세 차례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는데 세 번이면 어떻고 열 세 번이면 어떻습니까? 이 기간동안 북한은 핵실험을 했고 미사일발사 횟수는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렵습니다. 툭하면 평화를 말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진짜 평화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5,6공때는 1985년 12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을 하고 1991년 11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에 이어 1992년 2월에는 비핵화 공동선언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김영삼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니까 북한이 1993년 3월에 NPT 탈퇴를 통보했습니다.”

YS이야기가 나오자 박장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YS가 집권하자마자 정치적 보복을 당해 1년 4개월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했다. 그의 평가는 이어졌다.

“YS정부때는 냉탕, 온탕을 오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때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돼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지만 일방적인 퍼주기라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려웠지요. 이명박 정부때는 ’비핵개방 3000‘이라는 어정쩡한 대북강경책을 내세우는 바람에 남북관계가 최악이었습니다.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박근혜정부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지금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가 북한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북한은 20개에서 70개까지의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ICBM에 최근에는 SLBM(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까지 개발했습니다.”

-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를 보면 한일관계는 최악이고 미국과는 소원해졌으며 중국 러시아와도 데면데면하고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으로 밀어주는데도 정작 북한으로부터는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라인 책임자에게 전임자로서 어떤 조언을 해주시겠습니까?

“현 정부는 의욕이 너무 앞서서 국제정치의 현실과 북한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다보니 외교적으로 동맹국간에 혼선을 빚고 있고 국내적으로도 여야를 넘어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안보, 외교, 경제, 국론분열이라는 4중고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대통령 참모들이 알아야 합니다. 100여년 전 구한말, 우리는 망해가는 중국만 믿고 있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냉전 종식이후 미국 일방의 G1시대가 이어지다가 2001년 월드트레이드(센터) 폭파,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등을 겪으면서 체면과 위신이 손상됐습니다. 그사이 중국은 미국의 제1채권국이자 아프리카 아시아에의 투자를 통해 G2반열에 올라섰습니다. 트럼프는 미국 국익우선주의를 내세워 신망을 많이 잃었지만 맹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튼튼해야 중국도 일본도 북한도 우리를 얕보지 않습니다.

북한은 어떤 경우에도 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북한 핵문제의 유일한 가능성은 중국의 힘을 빌리는 겁니다. 현재 중국의 태평양 진출에 유일한 전략적 자산이 북한입니다. 미국을 설득하여 중국의 태평양진출을 인정해줄 테니 대신 북한이 핵과 대량살상무기를 완전히 폐기하도록 보장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핵무기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담판을 중국과 해야 합니다. 트럼프는 지금처럼 한국에서 반미데모가 계속되고 무기판매가 순조롭지 않으면 애치슨 라인처럼 미국의 방어망에서 한국을 제외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렇게 엄중한 시기에 위기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는 어느덧 예정했던 한 시간을 훌쩍 넘겨 두 시간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자신이 만났던 국내외 인사들의 이름과 만난 시점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정치현장을 떠난 후 시인으로 등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린 시절 꿈이 불꽃같은 열정과 맑은 영혼을 지닌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과 주변의 권유로 법과대학에 진학했고 사법고시를 치러 검사가 되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문학에의 꿈을 놓지 않아 독문학을 연구하는 ’독우회‘란 서클을 만들었는데 지도교수가 바로 전혜린 선생님이었습니다. 검사로 청와대에 파견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정권이 바뀐 뒤 1년4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에서 ’눈 내린 새벽‘, ’민들레꽃‘ 같은 시를 써서 가족한테 보낸 것이 기자들에 의해 언론에 보도됐고 조병화, 박재삼 같은 원로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습니다. 그동안 네 권의 시집을 냈고 7개의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문학 이야기가 나오자 6공화국의 황태자로 불리던 시절과 다름없이 형형하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박시인이 말했다 “남아있는 세월이 길지 않습니다. 권력은 이미 떠났고 가족과 문학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름답게 떠날 준비를 해야지요”

[사진=남궁진웅기자]

그의 현직은 시인 외에 무료 법률상담 변호사,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 대구경북 발전포럼 이사장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박철언은 한반도 격동의 시대 주역에서 물러난 원로라기 보다는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청년이었다. <논설고문 · 건국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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