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모가 나기 4년 전인 1886년에 나라에는 콜레라가 크게 번졌다. 서울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송장을 나르는 들것이 수구문 밖으로 줄을 잇다시피 하였다. 그 뒤로 해마다 여름이면 콜레라가 돌았다. 콜레라가 얼마나 무서우면 범 같다 하여 호열자(虎列刺)라 이름하였을까. 세균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한방의학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1897년 7살의 류영모도 콜레라에 걸렸다. 쌀뜨물 같은 설사를 계속하여 탈수증으로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고쳐줄 수 있는 의사가 없으니 그야말로 천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김완전은 설사 때문에 아이가 죽어 간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설사를 억지로라도 막으려고 손바닥으로 아들의 항문을 막았다. 항문을 막은 지 7~8시간을 지나자 죽어 가던 영모의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기적이었다. 항문을 솜으로 틀어막고서 미음을 끓여 떠 먹이니 아이는 다시 살아났다. 죽음에서 건져낸 어머니. 류영모는 그때 다시 한 번 태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형제 13명 중에서 2명만 살았다
형제 자매가 13명이었다. 그중에서 스무 살을 넘기며 살아남은 것은 두 명뿐이었다. 류영모와 동생 류영철(永哲)인데, 류영모 위로 형이나 누나가 몇인지, 혹은 아래로 동생들이 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형제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랐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인생관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형제의 요절 가운데서도 류영모가 21세 때 잃은 동생 영묵(永黙·당시 19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았다고 한다.
형과 아우들이 죽어가는 걸 보며, 그는 어린 시절 의사가 말한 "이 아이는 서른 살을 넘기기도 어렵겠는데요"라는 말을 거듭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청소년기였다. 왜 이렇게 많은 형제들이 죽음을 겪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국가 쇠망의 시절과 식민지 초기의 처절한 궁핍과 혼란 그리고 수시로 돌았던 콜레라 같은 전염병과 의료체계의 미비가 아이들을 죽음으로 떠밀었음에 틀림없다. 자식의 숱한 죽음을 겪어야 했던 부부는 그러나 비교적 장수했다(부친 류명근은 67세, 모친 김완전은 88세).
서른 살도 못 산다는 얘기를 들었던 류영모가 91세까지 살게 된 것은 극기(克己)를 바탕으로 하는 투철한 자기 관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체구가 작고 몸이 약했던 아버지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류영모는 자신의 키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몸은 오척(五尺)쯤 돼요. 여러분은 두세 치 더 클 것입니다. 같은 오척 단구(短軀)라도 이를 비관하는 사람이 있고 낙관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키가 작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건 관(觀)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관(觀)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이 다르면 사는 세계가 다릅니다."
아이 때문에 앓지도 못하는 어머니처럼
작은 몸과 약한 체질을 타고난 류영모는 20살 전후부터 냉수마찰과 요가체조를 했다. 오래 걷기를 평생 즐겼다. 그는 약국이나 병원에 가는 법이 없었다. 감기조차 앓는 법이 없었다. 그는 죽음을 잊지는 말되 몸은 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몸의 털과 살갗까지도 어버이로부터 받았으니 구태여 함부로 하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증자(曾子)의 생각을 그는 평생 실천했다. 그는 몸의 건강이 하느님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한 기초라고 여겼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건강은 책임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문에 앓지 못하는 어머니처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앓을 수 없는 육체를 가지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도서에는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좋다. 산 사람은 모름지기 죽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웃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시름이 서리겠지만 마음은 바로잡힌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잔칫집에 있다"(전도서 7:2~4)는 말이 있다. 형제의 죽음을 여러 번 겪으면서 성장한 류영모는 23세에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버리고 신앙생활로 일생을 마감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그의 삶은 죽음을 품은 삶이었다. 인생의 공통숙제라 할 수 있는 죽음의 문제를 이렇게 들여다보았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입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육체를 먹고 정신이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뚱이는 벗어버릴 허물이요, 옷이지 별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얼(靈)입니다. 이 몸뚱이는 멸망입니다. 멸망해야 할 것이니까 멸망하는 것입니다. 회개(悔改)란 쉽게 말하면 몸뚱이는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몸이 죽어도 얼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참나로 착각하는 것이 멸망입니다."
식물은 환경이 좋으면 꽃이 안 핍니다
식물은 환경과 영양이 좋으면 자신의 죽음을 잊어버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화훼를 기르거나 농사지어 본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또 새가 땅 위에서 공격해 오는 짐승이 없으면 날아오르는 비상력을 잃어버린다. 뉴질랜드의 키위, 남극의 펭귄이 그 예다. 사람이 죽음을 잊어버리면 삶의 목적을 잊어버린다. 죽음이 참삶을 살게 하고, 참삶이 죽음을 이기게 한다. 예수와 석가는 죽음을 정면으로 돌파한 사람이다. 죽음을 외면하고 회피하면 참된 삶을 살 수가 없다. 자기 죽음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이라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죽음이란 무섭고도 싫은 것이라 하여 애써 모른 체하고 살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허둥지둥 발버둥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공자(孔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논어> 이인편)고 하였다. 아침에 도를 들었으니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죽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진짜 삶이다.
[다석의 추억, 이곳 - 구기동 회화나무]
"사정(射亭) 앞 홰나무,
네다섯 살 적부터
외가(外家) 갈 적에 활 쏘는 정자 앞을
지나면 저 큰 나무 봬.
우리 다 왔구나. 우리 외갓집에.
그 나무는 그저 날 보네.
여든 바퀴 몇 바퀴."
('다석일지(多夕日誌)' 중에서)
세검정을 지나서 구기동 입구에 활 쏘는 사정(射亭)이 있으며 그 자리에는 늙은 홰나무(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80세 이후 류영모가 그 나무를 보고 옛날을 회상하며 쓴 글이다. 어머니는 박석고개 너머에서 시집을 왔는데, 나중에 친정이 구기동으로 이사를 간다. 류영모가 구기동에서 살게 된 것도 외가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외가 갈 때 보던 회화나무를 보면서 삶을 여기까지 오게 한 시간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수백년을 사는 회화나무에 비하면, 자신의 나이테 팔십 몇 바퀴는 그리 길지 않지 않은가. 그 회화나무 근처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거기엔 1960년대까지도 장판지를 만드는 제지공장이 있었는데 구기터널이 뚫리면서 아주 달라져 버렸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