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타임머신] 동농 김가진과 대동단, 독립운동사의 숨겨진 의혈(義血)
“음(陰)이 극에 달하면 양(陽)이 나타나고, 꽉 막힌 운수가 가면 형통한 운수가 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하늘의 이치이며, 죽을 처지에 놓이면 살길을 찾고, 오랫동안 굴복하면 일어나려 하는 것이 사람의 당연한 감정이다.
세계개조론과 민족자결주의는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가 독립국이며 우리 민족이 자유라는 외침은 세상에 가득하다. 이에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 정부를 세웠는데, 저 완고한 일본은 시세의 흐름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표범과 이리 같은 야만적인 습성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벌여 빈손의 민중을 총살하고 성읍과 촌락을 불태웠으니, 이것이 인류의 양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陰極陽面하고 否往泰來는 天理之好運이며 處死求生하고 久屈思起는 人道之至情일새 世界改造民族自決之論은 高於天下하고 我國獨立我族自由之聲은 漲於宇內라 於是焉三月一日에 宣言獨立하고 四月十日에 建設政府러니 頑彼日本이 不顧時勢之推移하고 徒使豹狼之蠻性하야 大肆壓抑에 白手徒衆을 銃斃하고 城邑村落을 火燒하니 此가 人類良心에 堪爲할 바일가 吾族의 丹忠熱血은 決코 此非正理的壓迫에 減縮될 바가 아니오 益益히 正義人道로써 勇往邁進할 뿐이로다 萬一日本이 終是悔過가 無하면 吾族은 不得已 三月一日의 公約에 依하야 最後一人 最後一刻까지 最大의 誠意와 最大의 努力으로 血戰을 不辭코저 玆에 宣言하노라 <大同團宣言>
이 글은 3.1운동 이후 설립된 최대 항일 지하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이 1919년 11월28일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대동단선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선언서는 동농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 썼다. 동농, 이 사람은 누구인가. 대한제국 대신(大臣)의 지위를 떨치고 임시정부에 합류한 인사로, 대동단의 총재를 맡았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분신자결한 김상용의 11대손인 김가진은, 주일공사를 지냈고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한 바 있다. 대한제국이 출범한 뒤 그는 농상공부와 법무 대신을 역임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뒤 일제는 대한제국 관료 76인에게 작위를 준다. 김가진은 이때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그는 항일단체인 대동단의 총재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상해로 망명한다.
# 전하종차왕가(殿下從此枉駕), 의친왕 망명 추진 사건
상해로 망명을 하면서 동농은 대담한 ‘항일 프로젝트’를 구상한다. 의친왕(義親王) 이강은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아우다. 황위 계승 서열로 보면 순종 다음 차례로, 그를 상해로 망명시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게 한다면 일본을 깜짝 놀라게 할 일임에 틀림 없었다.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의 계승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의친왕에서 편지를 보낸다. ‘小人今往上海計, 殿下從此枉駕(소인금왕상해계 전하종차왕가)’ 13글자로 된 서한이었다. “제가 지금 상해로 갈 계획인데, 전하도 저를 따라 오시기를.” 이런 메시지였다. 의친왕은 망명을 결심하고 임시정부로 친서를 보낸다. “나는 독립되는 나라의 평민이 될지라도 합병한 일본의 황족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이 상해로 간 뒤, 의친왕은 대동단의 안내를 받으며 11월10일 수색역을 출발한다. 그때 일본 경찰이 상황을 포착하고 의친왕 수배령을 내린다. 그는 단동에서 붙잡히고 만다. 이후 대동단은 의친왕의 명의로 김가진이 기초한 ‘대동단 선언서’를 발표했다. 일제가 대대적인 수색에 나서면서 대동단은 와해된다.
# 임시정부 최고고문 김가진의 연설
상해 민단은 1919년 12월 세 차례의 시국강연회를 연다. 7일 첫 강연회의 첫 연사는 동농이었다. 이날 김가진 뒤에 연설한 사람은 남형우(임시정부 법무총장)와 도산 안창호였다. 김가진의 연설 ‘신구(新舊, 새날과 옛날)에 대하여’의 내용은 1919년 12월27일자 독립신문에 실렸다.
“우리나라는 단군 성조께서 개국하신 이래로 내치나 외교에 다 자주(自主)하였으나, 조선왕조 이후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히 여기면서 점차 퇴락하여 마침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3.1운동 이후 새로운 정부를 세운 것은 대한동포의 피와 생명으로 얻은 것입니다. 우리의 성공을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국민이 내외일치하여 임시정부를 사랑하고 받들 어야 합니다. 둘째 한 마음 한 몸으로 독립을 향하여 용감히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청년 자제를 많이 외국으로 보내어 교육시켜야 합니다.” 김가진은 임정활동에 참여하면서 임정 중심의 독립운동과 해외 교육을 통한 미래인재 양성을 역설한 것이다.
김가진이 임정 고문이었다는 사실은 공식 기록으로는 나와 있지 않다. ‘나절로’라는 필명을 쓰며 상해에서 활약했던 우승규는 “김가진이 임정 최고고문으로 추대되고 항일구국 운동 전열에 참여했다”고 증언한다. 월정사의 승려 이대정과 신상완 또한 “김가진이 임시정부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경성신문 사장 아오야기 난메이도 “그가 임정의 하나뿐인 고문 지위에 있다”고 기록했다.
# 상해 3.1절 기념식 무대 중앙에 선 김가진
1919년 3월1일의 만세시위는, 일제 치하의 겨레에게는 바닥으로 떨어졌던 민족적 자존감을 일깨운 기적같은 기억이었다. 지금도 3.1절 행사를 하지만, 만세시위 다음해의 3.1절은 그야 말로 생생한 기억이 살아있는 감격의 날이었을 것이다. 1920년 3.1절 1주년 행사는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열린다. 극장에는 태극기와 만국기가 나부꼈고 붉은 비단으로 두른 벽에는 ‘대한독립선언기념’이란 글씨가 붙었다. 무대의 서쪽문에서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이동휘가 걸어나왔다. 그 뒤로 이동녕 내무총장, 신규식 법무총장, 그리고 김가진 고문이 입장했다. 그 뒤에 이시영 재무총장, 박은식(뒤에 임시대통령을 맡았다),손정도 의정원 의장, 현순 목사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대한민단 단장 여운형이 개회식을 선언했고, 애국가 제창과 태극기 게양식이 진행됐다. 대형 태극기를 당기는 줄이 김가진과 박은식 두 원로의 손에 쥐어졌고 그들이 줄을 당기자 태극기가 나타났다. 태극기의 모습이 보이자 객석의 참석자들의 흐느낌이 터져나왔고 애국가를 부를 때에는 울음바다가 됐다. 이듬해인 1921년 3.1절 때는 대통령 이승만이 참석했고, 김가진도 중앙단상에 앉아 행사를 진행했다. 1922년 3.1절 김가진은 ‘3.1절 유감’이란 시를 남긴다. “원컨대 우리 민족이 더욱 단결하여/하루 빨리 조국산하가 일제 지배를 벗어난 것을 보게 되기를”이란 내용이었다.
# 국내 자산가들이여, 재산의 50분의1을 군자금으로 내라
대동단 독립선언문 이후 대동단은 와해됐지만, 1920년 3.1절 이후 김가진은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그는 포고문을 직접 썼다.
“단원 제군이여. 혈전의 시기는 눈앞에 박두했음을 각오하십시오. 가일층 단결을 굳혀 준비를 완성하고 애국의 열성을 부분적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임시정부에서는 혈전 준비를 방금 급속히 진행 중에 있으며 본 총부에서는 최후의 행동에 대한 획책을 불원간에 발현한 것이니 일생일사를 우리 민족의 사명에 맡긴 제군은 일도 일진 일퇴를 모두 총부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대동단 재결성이 이뤄진 데에는, 국내에서 활약하던 나창헌이 상해로 망명해온 것이 계기가 됐다. 김가진은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갹출하기 위해 ‘갹금권고문’도 작성한다.
“왜적의 속박을 탈피하고 반도 강산에 태극기를 휘날리는 날이 목전에 임했습니다. 북으로는 모지에 연락을 취하고 남으로는 모방의 후원을 얻어 방금 혈전을 개시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1920년 3월10일에 작성한 권고문에는 대동단 김가진 총재를 비롯해, 무정부장 박용만, 상무부장 나창헌, 외교부장 손영직, 재무부장 고광원의 서명이 올라가 있다. 대동단의 군자금 모집 정황은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1920년 3월1일엔 김가진의 자금모집 편지를 품에 넣었던 목사 김유화가 종로경찰서에 검거됐고, 경성과 전남 일대를 오가면서 재력가들에게 자금을 요청한 신덕영 대동단 조선총지부장이 적발됐고 김가진 명의의 군자금 모집증을 갖고 활동하던 박제웅(박종봉)도 붙잡혔다. 박제웅이 지닌 군자금 모집증에는 ‘전재산의 50분의 1을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낼 것’을 촉구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김가진은, 초기 임시정부의 투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동단 총재로서 혹은 임정 고문으로서 사방팔방으로 활약을 펼쳤다.
# 임시정부의 온건론에 반발한 철혈단의 수령 김가진
초기 임시정부는 의욕과는 달리 상당한 내분에 빠져 있었다. 대동단은 이런 기류에 대해 비판하면서 “지난 1년여 동안 취하여 온 평화적 수단은 도리어 문약무혈(文弱無血)의 환각일 뿐이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노선과 출신지역, 독립운동 자금 분배 등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커졌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은 “임정에 문치파와 무단파가 있는데, 무단파의 핵심인 대동단은 김가진과 나창헌이 실권을 잡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1920년 6월 나창헌은 임정에 불만을 품은 청년 58명을 모아 ‘철혈단’을 조직한다. 이들의 목적은 임시정부를 전복하여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 철혈단의 수령이 김가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철혈단은 임정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했는데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부패한 분자가 적지 않고 독립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자기의 명예를 넓히고자 하는 야심가가 있으며 왜구를 물리치기 보다는 동적을 멸시하는 자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이같은 분자는 독립을 방해하는 악마이며 마땅히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혈단은 출범한지 얼마 안되어 임시정부 내무부를 습격한다. 당시 임정 경무국장이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 사건은 일본영사관의 사주를 받은 황학선이 나창헌의 애국열정을 이용해 임정의 간부들을 암살할 계략으로 꾸민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구는 황학선을 처단한 뒤 그의 자백내용을 나창헌에게 보여준다. 이후 나창헌은 철혈단에서 벗어나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한다.
# 임시정부 대통령 후보에 올랐던 김가진
김가진은 독립협회 시절부터 이승만과 가까웠다. 이승만의 미국행을 주선해주고 여비까지 보태준 사람이 김가진이었다. 김가진이 상해로 망명을 왔을 때 이승만은 그곳에 있던 측근 안현경에게 김가진을 만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임된 이승만이 상해에 부임하지 않자 큰 논란이 일었는데, 이후 그가 상해에 왔을 때는 더 큰 분란이 일어났다. 이동휘는 이승만에 대해 “독립정신이 불철저한 썩은 대가리”라고 비난하며 국무총리직을 사퇴한다. 홍진과 최창식은 “이승만이 수많은 국내 자산가들이 내놓은 독립운동 자금을 호화생활에 쓰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때 김가진과 대동단원들도 이승만에 대한 호의를 접기 시작한다. 김규식, 노백린, 안창호 등 각원들은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했다. 이승만은 상해를 떠나 남경으로 간다. 이후 임정 대통령을 새로 뽑아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고, 후보에 김가진, 백준(대종교 백순의 오기인 듯), 박은식, 안창호가 추천됐다. 결국 안창호로 결정됐지만, 노구의 김가진이 대통령 후보에까지 오른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런 투표가 있었던 1922년 6월은, 그가 숨지기 한 달 전이었다.
# 마지막 불꽃
한편 김가진은 당시 일본의 도쿄로 가서 독립을 역설할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3년전인 1919년 11월 여운형이 일본에 가서 정계 요인들을 상대로 조선독립을 요구한 ‘조헌문란(朝憲紊亂)’을 일으켰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76세나 된 주일공사 출신의 조선고관이 도쿄에서 그같은 호소를 한다면 훨씬 파괴력이 클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그 마지막 독립운동을 벌일 시간이 없었다. 그가 눈을 감았을 때, 장례식은 임정 주석 홍진이 주관했다. 추도사는 안창호가 읽었다.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김가진은 광복사업에 목숨을 바칠 생각으로 망명하여, 조국 독립의 희망을 안고 해외에서 활동하다가 중도에 세상을 떠났다.” 임시정부와 대동단을 이끈 의기의 마지막 불꽃은, 동지들의 추도 속에서 아쉽게 꺼져갔으리라.
26일 서울에서 열린 ‘조선민족대동단 100주년’ 학술회의는, 그 장려한 자취를 돌아보는 자리였다. 수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대동단을 이끈, '불굴의 독립투혼' 동농 김가진을 재조명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