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타계한 지 10년째 되던 1981년 MBC여론조사에서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는 여전히 배호였다. 2005년 광복60주년 KBS '가요무대' 여론조사에서 뽑은 국민가수 10인에 그는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60년대는 슬픔과 희망이 투 트랙으로 함께 돌고 있던 시절이었다. 전쟁 이후의 가난은 쥐어짜는 아픔 같은 농촌 트로트를 피워올렸고, 조국 근대화를 타고 들어온 서구 바람은 스탠더드 팝을 번성시킨다. 최희준에게서 냇 킹 콜의 분위기가 나고, 패티김에게서 패티 페이지의 냄새가 나는 건 그런 유행 때문이다. 배호는 기묘했다. 도시의 모던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골의 향수를 깊이 자아내는 매력이 있었다. 카운터컬처(반문화)라 할까. 배호 스타일은 한 시절을 사로잡는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제 창법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처음에 노래 부를 때 '참 건방지게 멋있다'라는 말을 들었죠."
1966년 신장염이 발병한다. 요즘이면 큰 병도 아니라지만 당시엔 치명적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누가 울어'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 빅히트를 한 것은 이 무렵이다. 1967년 3월 장충동 녹음실엔 몸도 못 가누는 배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 소절 부르고는 주저앉고 다시 일어나 한 소절 부르고는 주저앉았다. 한 시간 남짓 힘겨운 녹음을 마친 뒤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그는 그곳을 나갔다. 그날 부른 노래는 '돌아가는 삼각지'. 용산구 한강로1가에 세워진 입체교차로를 노래한 곡이다. 교차로는 1994년에 철거되고 배호 노래비만 남았다. 당시 삼각지에는 배호 노래 때문에 술집이 늘어났고 여성들의 아픈 사연도 많아 노랫말이 현실이 됐다.
1968년 7월 TV '가요일번지'의 PD작업실에 전화가 울린다. "가수 배호가 사망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이미 통곡을 한 뒤인지 목이 잔뜩 쉬어있는 어느 여성의 전화였다. 이날 정봉화 PD는 같은 질문의 전화를 50통쯤 받았다. 갑자기 불거진 '배호사망설'의 자초지종은 이랬다. 배호가 지방공연을 펑크내자 흥분한 관객들이 난동을 부렸다. 엉겁결에 나선 사회자가 상황을 수습하려 "전날 갑자기 병이 재발되어 입원했는데 그만..."이라고 얼버무렸다. 이 말이 떨어지자 좌중이 갑자기 울음바다로 변했다. 방송국에 확인전화가 빗발친 건 그 이후였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을까.
2년 뒤 그에겐 놀라운 봄이 왔다. 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병마가 내 몸에서 사라진 것 같아요." 1968년 늦가을 배호는 부활의 괴력처럼 최희준과 남진의 인기를 앞지르며 가요계 판도를 뒤흔든다. 영화 출연도 한다. '남정임, 여군에 가다'라는 작품에 중절모 뿔테안경을 쓴 위문공연 가수로 등장했다. 방송 출연, 업소 출장, 지방 공연이 잦아져서였을까. 이듬해인 1969년 병마가 다시 찾아온다. 12월 MBC 10대 가수상 수상 때는 동료가수 이상렬이 그를 업고 출연하기도 했다. 그해에 부른 노래 '안녕'을 자세히 들어보면 가래 끓는 소리가 처연하게 터져나온다. 1970년에는 다시 좀 나았다. 연말 가수상 시상식에 스스로 걸어나오는 배호를 보고, 팬들이 열광을 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1971년 병세가 악화되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는다. 이때 '0시의 이별'과 '마지막 잎새'를 취입한다. "죽어도 노래하면서 죽을 거예요." 이런 말을 하면서 그는 숨을 헐떡이며 노래를 불렀다. 어떤 때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음악만 틀어놓고 무대에 서있던 적도 있었다.
1971년 10월 20일 MBC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 게스트로 배호가 앉아 있었다. 공식석상으로는 마지막 자리였다. 11월 낙엽이 바람에 후두둑거리던 저녁, 그는 운명했다. 11일 예총회관(현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가수협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운구 행렬에는 소복 입은 젊은 여성들이 수백 미터나 늘어섰다. 그의 묘지에는 팬들이 날마다 몰려들었다. 서울 삼각지를 비롯해 양주군 장흥면 묘지, 경주시 현곡면, 강릉 주문진, 인천에 그의 노래비가 섰다. 배호 노래 30여곡에선 비가 내리고 10여 곡에는 안개가 끼여 있다.
배호가 임종하기 전까지 1년 가까이 그를 간호했던 여성 하나가 있었다. 옥이라는 이름을 지닌, 배호보다 7세 연하의 그녀는 대구 공연 때 꽃다발을 걸어준 팬으로 알게 됐다. 죽기 하루 전 배호는 자신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그녀에게 건네주며 그녀를 설득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병실 문에 기대서서 흐느끼던 그녀는 배호 지인들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나와야 했다. 16일 '불후의 명곡'에서 최종 우승을 거머쥔 사람은 조선족 가수 백청강이었다. 그는 데뷔 이듬해인 2012년 직장암 판정을 받고 2년간 투병생활을 했다. 그후 완치 판정을 받은 뒤 재기하는 무대에서 배호의 '누가 울어'를 새롭게 해석해 객석의 심금을 울렸다. 수십년을 건너 뛰어, 누군가의 눈물은 이렇게도 전승되는가.
▶ 차중락, 엘비스 프레슬리가 울고갔을 '낙엽의 가객'
그는 노래 한곡으로 남았다. 창작곡도 아닌 번안곡 하나로 차중락은 낙엽의 가객이 되었다. 방송의 음악진행자들은 이 노래를 틀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원곡보다 차중락의 이 노래가 훨씬 뛰어나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아마도 엘비스가 와서 이 노래를 들었으면 깜짝 놀랐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윤기있는 목소리가 쇠로 된 긴 파이프 속의 공명을 타고 나온 듯 서늘하게 흐르는 노래는 사랑에 빠진 심장과 노랫말의 처연한 열기 때문에 지지직거리며 타오른다. 뚝뚝 끊기는 술회가 끝까지 끊기지 않고 가을 낙엽의 추락하는 동선을 타고 팔랑거리며 흐른다. 슬쩍 분 바람에 날아오르는 나뭇잎처럼 때론 가볍게, 다시 곤두박질치는 나뭇잎처럼 때로 무겁게, 노래는 방백처럼, 스스로에게 건네는 편지처럼 무심한 동작으로 나부낀다. 슬픔에도 온기가 있고 격정과 고뇌에도 품격이 느껴지는 그런 노래다.
찬 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들어/그 잎새에 사랑의 꿈을 고이 간직하렸더니/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너와 나의 사랑의 꿈이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1966년 스물네 살의 가을. 이화여대 메이퀸이었던 여자친구가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11월 10일 그는 엘비스의 1962년곡 'Anything that’s part of you(당신의 모든 자취)'를 번안한 노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발표한다.
3년 전인 1963년 그는 사촌형인 차도균을 따라 그룹 '키보이스'의 보컬로 합류했고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무렵 시민회관 공연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창했을 때 객석에서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엘비스의 목소리를 빼닮았다고 이미지까지 비슷하다고 말했다. 신세기 레코드에서 아예 엘비스의 번안노래를 취입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있었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의 가사는 레코드 사장의 아들 강찬호가 지은 시였다. 그의 아픔을 담은 작품이었는데, 실연한 차중락에게는 마치 자신의 얘기처럼 절절하게 느껴졌다.
사랑의 꿈이 낙엽따라 가버리는 운명이었을까. 이 노래를 내놓은 지 정확하게 2년 만인 1968년 11월 10일, 서울의 어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뇌막염으로 쓰러져 죽음을 맞는다. 그는 망우동 공원묘지에 묻혔다. 묘비엔 시인 조병화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낙엽의 뜻'이란 글이다.
"세월은 흘러서 사라짐에 소리 없고/나무닢 때마다 떨어짐에 소리 없고/생각은 사람의 깊은 흔적 소리 없고/인간사 바뀌며 사라짐에 소리 없다/아, 이 세상 사는 자, 죽는 자, 그 풀밭/사람 가고 잎 지고 갈림에 소리 없다" <조병화의 '낙엽의 뜻'>
죽은 이듬해인 1969년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된다. 제1회 낙엽상은 나훈아가 받았다. 1970년에는 김기덕 감독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란 영화가 개봉된다.
차중락은 시인 김수영(1921~1968)과 이종사촌 간이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모두 1968년에 타계한다. 차중락의 부모는 모두 체육인이었다. 부친은 보성전문학교 마라톤 선수였고 모친은 경성여상의 단거리 선수였다. 그런 피를 타고난 차중락은 고교(서울 경복고) 시절에 육상선수로 활약을 펼쳤다. 대학(한양대 연극영화과)에 가서는 보디빌더로 종목을 바꿔, 당시 미스터코리아 2위로 입상한 적도 있었다. 그는 체육에 능했을 뿐 아니라, 미술도 잘했고 영화도 좋아했다. 학창시절 포스터 그림을 잘 그려 주위의 찬사를 받았고, 영화 감독 지망생이기도 했다. 거기에다 음악까지 뛰어났으니, 신은 이 다재다능을 질투한 것일까.
사람은 가고 그 사랑하던 마음도 다 흩어졌으나, 노래만은 남아 해마다 늦가을 이맘때만 되면 그 윤기와 온기가 넘치는 그 목소리로 뜨겁던 날들을 증거하고 있으니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들도 그 낙엽따라 다시 돌아오는 영원한 회귀의 애가(愛歌)다. '불후의 명곡'에서는 2인조 보컬그룹 바버렛츠가 이 노래를 불렀다. 스스로 '시간여행 복고풍 걸그룹'이라 부르니, 노래와 걸맞기도 하다. 레트로 감성이 우아하면서도 참신하다. 잘 만든 복고 영화 같은 장면들이, 노래와 기억 사이를 지나간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