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꽃피는 화려한 봄날에 큐슈를 찾았다. 하지만 구마모토(熊本)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혼묘지(本妙寺)에 도착하니 뭔가 알 수 없는 처연함이 밀려온다. 2016년 봄날에 일어났던 지진 흔적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있기 때문인가. 이 절의 명물인 급경사 오르막 계단을 따라 길다랗게 층층이 나열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석등들도 더러 무너진 모습이었고 절 뒷편 부도(浮屠 승려의 사리를 모신 탑)가 모셔진 구역으로 가는 길목의 축대조차 제대로 손을 보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좁은 계단을 따라 몇 발자국 내려가니 샛길이 나왔고 5분쯤 걸으니 역대주지들의 부도가 산언덕을 뒤로 한 채 길을 따라 일렬로 자리잡았다. 초대주지를 중심으로 좌우로 짝수 홀수 순서대로 번갈아 배치했다. 500여년의 인물역사가 타임캡슐처럼 저장된 곳이기도 하다. 3대주지 일요(日遙니찌요우1580~1659)스님 승탑(부도) 앞에서 일행들과 함께 두손모아 고개를 숙인다. 낡고 바랜 돌 빛깔과 말라버린 이끼 흔적사이로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자를 찬찬히 확인했다. 사실 혼묘지에서 느끼는 처연함은 지진흔적보다도 임진란의 상흔과 아울러 일요(日遙니찌요우1580~1659)스님의 사연때문이리라.
부자지간에 주고 받은 편지 원본이 사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지진의 여파 때문에 문을 닫아놓은 상태였다. 스님의 진영과 편지는 사진판으로 관람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한문으로 된 친필 원본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노성환 교수(울산대)가 한글로 번역한 4통의 편지글을 만나게 되었다. 2통은 아버지가 보낸 것이고 2통은 일요스님이 쓴 것이다. 일요스님의 마지막 편지는 부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1통은 이미 고향으로 보낸 편지다. 그런데 보낸 편지까지 남아 있는 것은 미리 2통을 작성하여 1통을 자신이 보관했기 때문이다. 손편지 시대에 손편지란 유일본인지라 나의 손을 떠나면 원본은 다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사인(私人)으로 부친께 보낸 글이지만 주지라는 공인(公人)의 직분도 망각하지 않았다. 사본을 공문아닌 공문형식으로 따로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공사(公私)를 둘로 나누지 않는 가치관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남겨진 편지가 뒷날 자신의 귀향을 가로막는 필화(筆禍)의 근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 편지의 내용 속에 “가장 원통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제가 오늘까지 주군의 녹으로 먹고 살고 주인의 의복을 입고 자란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라고 하여 ‘그동안의 은혜가 오히려 원통하다’는 본심까지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일본사람은 없었고 같은 신세인 조선인들을 친구로 두고 있다는 내심까지 들통나게 된다. 심지어 “뒤를 이어 영주가 된 아들(가토다타히로加籐忠廣)은 젊고 식견이 부족한지 (이 일로 인하여) 기분이 상하여 결단을 내리지 않은 채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직설적인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았다. 아들의 편지내용이 너무 솔직하고 과격한 까닭에 이런 모습이 도리어 귀국 계획을 그르치고 있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주군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면 너는 아마도 오늘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노부모 봉양을 위한 천륜 때문에 어쩔수 없이 고향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내용으로 청원을 올리라는 모범답안까지 제시할 정도였다.
‘새장속의 새’처럼 감시받는 상태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여러 차례 오고가야 할 편지가 영주(領主)측의 검열과정에서 사라지거나 전달을 책임진 사람이 수고비만 챙기고 중간에서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사실도 남아있는 편지가 보여준다.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인사가 공인이라는 직분을 망각한 채 오직 핏줄이라는 인정에 끄달려 절제하지 못한 감정적인 편지글로 인하여 오히려 주변인들의 미움을 사게되어 마지막까지 귀국을 허락받지 못한 빌미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곁표현)를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던 현지의 생존방식을 잠시 포기한 결과로 인하여 틀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긴 편지글과 갖가지 읍소도 귀국의 결과를 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사적인 통로를 이용하여 편지를 전달하고자 시도하고 부친에게 선물 동원까지 부탁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가토(加籐)집안이 몰락하고 이후 영주로 등장한 호소가와(細川)가문의 태도 역시 가토집안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남아있는 편지를 꼼꼼하게 읽었다. 진심으로 귀국을 성사시키고자 했다면 검열까지 염두에 두고 좀더 용의주도한 자기검열을 통한 절제된 외교적 수사가 동원된 보여주기용 편지글이 필요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와중에 목숨을 부지하고 신분을 보장받은 계기가 된 글은 단 두 줄의 필담을 구사한 경험도 있었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3)의 작품을 인용하여 그야말로 일부러 ‘유식함’을 보여주기 위한 자료로 활용했던 내공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하동 땅 보현암에서 적에게 잡힌 이후 ‘영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그 시절에도 직감으로 알지 않았던가?
원상한산석경사(遠上寒山石徑斜)
백운생처유인가(白雲生處有人家)
홀로 깊은 산에 올라 돌길을 걸어가니
흰구름이 피어오르는 곳에 인가가 있네.
4통의 편지와 두 줄의 한시를 읽으며 한 줄의 평을 덧붙인다.
어린 여대남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지만 어른이 된 일요는 그렇치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