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없는 오너나 도덕성 문제가 불거진 오너의 경우 언제든지 퇴출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국민연금의 주주권행사로 국내도 유럽이나 미국처럼 전문경영인 체제가 자리잡을 수 있을지 업계의 관심이 집중된다.
27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대한항공은 이날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제57회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안을 부결했다.
주주 64.1%가 찬성표를 던졌지만 정관상 의결정족수 3분의2를 넘지 못했다. 재선임안 부결에는 2대주주인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진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 11.6%를 보유한 2대 주주다.
대한항공은 오는 6월 1일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총회를 위해 조 회장의 리더십이 필요한 상황이다. 조 회장이 물러나면서 이사회의 유일한 오너일가인 조원태 사장이 시험대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재계는 입김이 세진 국민연금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갑질 논란을 빚은 기업들은 편치 않은 상황이다. 대한항공의 경우처럼 기업의 부당지원행위, 경영진 일가의 사익 편취행위 등도 기업의 수익에 영향을 주는 중대한 사안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연금이 지분 10% 이상을 보유한 기업은 포스코, GS건설, KT 등이다. 특히 갑질 논란이 있었던 대림산업의 경우 국민연금이 지분 13.2%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국민연금을 비롯한 주주들의 결정에 유감과 우려의 뜻을 피력했다. 전경련은 공식자료를 통해 "국민연금이 주주들의 이익과 주주가치를 감안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사안임에도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연임반대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도 반한 결과일 뿐 아니라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해야 했는데 아쉽다. 기업들이 장기·안정적 투자를 할 수 있도록 기업경영권이 더 이상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국민연금을 강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총은 "국민연금이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을 반대한 것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이었다"며 "국민 노후자금의 수익성과 안정성 확보라는 본질적 역할을 가진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권을 흔드는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불발의 가장 큰 원인은 도덕성 논란으로 꼽힌다. 국민연급은 '땅콩 회항', '물컵 갑질', '폭행 및 폭언' 등으로 연이어 도마에 오른 대한항공에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 권익의 침해 이력이 있는 이사 후보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다’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 원칙)를 적용했다.
조 회장의 사내이사 자리를 뺏기 위해 국민연금은 주총 전 찬반 의결권을 공시하면서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사전 분위기 조성이 가능했던 것은 올해부터 '국민연금은 10% 이상의 지분율을 가진 기업이나 국내주식 자산군 내 보유 비중이 1% 이상인 기업의 전체 주총안건과 수탁자위에서 결정한 안건에 대해 사전 공지'하기로 하면서다.
지난 26일 국민연금 조 회장 연임 반대 공시가 나오자 외국인 주주(20.50%)와 소액주주 등의 기타주주(34.59%)가 캐스팅보트를 쥐었고, 이미 분위기는 연임 불가능으로 쏠리는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