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파 이종일 선생은 죽을 때까지 일제의 온갖 회유책에도 굴복하지 않고 평생을 우리나라 광복에 바쳤지만 최후는 쓸쓸하고 비참했다. 이종일 선생은 1925년 8월 31일 돌보는 이 없는 초가(草家)의 거적 위에서 영양실조 끝에 서거했다.
1925년 9월 1일자 동아일보는 이종일 선생 서거에 대해 “영양불량이란 ‘병’으로 영원한 길을 떠났다는데”라며 “삼순구식(三旬九食,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으로 그럭저럭 지냈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종일 선생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그가 수감 생활을 할 때 사망했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이종일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종일 선생 생가지는 1990년 12월 31일 ‘도지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됐다. 소유자와 관리자는 모두 태안군이다. 보호면적은 2만1120㎡다.
이종일 선생 생가지 입구로 들어서면 태극기의 행렬을 지나야 한다. 태극기를 따라 들어오면 입구의 오른쪽에는 이종일 선생의 동상과 ‘옥파 이종일 기념관’이 있다. 왼쪽에는 관광안내소와 사당, 기념탑 등이 있다.
◆“삼순구식으로 그럭저럭 지냈었다”
체험관 안에는 태극기를 그릴 수 있는 장소와 이종일 선생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있다.
이종일 선생 생가는 ㄴ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 초가다. 남쪽으로부터 건넌방·대청·윗방·안방이 각 한 칸씩이다. 부엌이 2칸이고 앞에 마루를 깔았다.
생가 주위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생가 뒤에는 1990년 완공된 앞면 3칸·옆면 2칸의 사당이 있다.
이종일 선생은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선생 생가지는 태안군에서 3·1 운동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옥파 이종일 선생 추모사업회’가 주관하고 태안군이 후원한 이번 기념행사는 국권회복과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였던 순국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 숭고한 3·1운동의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추진됐다.
이날 행사에선 태안여중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시작으로 개회식, 가세로 군수 기념사, 태안군립 합창단의 3·1절 노래, 각종 상황극과 독립선언서 낭독 등이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만세삼창 퍼포먼스’를 통해 100년 전 3월 1일 온 국민이 거리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며 느꼈던 당시의 감동을 체험했다.
2부 행사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형 태극기에 군민들이 직접 핸드프린팅을 하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가세로 군수는 “위기 때마다 일치단결해 국난을 극복했던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더 잘사는 새 태안’ 건설을 위해 함께 힘을 모으자”고 말했다.
◆태안군에서 3·1 운동 정신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
옥파 이종일 선생 추모사업회가 주관하고 태안군이 후원한 이날 추모 제향에는 가세로 군수를 비롯해 각 기관 단체장과 지역 주민, 공무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추모 제향에선 가세로 군수가 초헌관을 맡았다. 이복용 성주이씨 대종회 상임부회장이 아헌관을, 김종인 추모사업회장이 종헌관을 맡았다. 지난해 이종일 선생 생가는 충남서부보훈지청으로부터 ‘3월의 우리 고장 현충시설’로 선정됐다.
정상에 오르면 서해의 ‘리아스식 해안’(하천에 의해 침식된 육지가 침강하거나 해수면이 상승해 만들어진 해안)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기암괴석과 소나무의 어울림,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장관이다.
‘안흥성’은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의 뒷산에 있다. 조선조 제17대 효종 6년(1655년)에 축성됐다. 둘레 1568m, 높이 3.5m인 석성(石城)이다.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지정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됐다.
조선조 고종 31년(1894년) 동학혁명 때 성내의 건물이 모두 소실됐지만 지금도 성곽과 동·서·남·북의 성문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다. 동문은 수성루, 서문은 수홍루, 남문은 복파루, 북문은 삼성루라 불렸다.
안면읍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승언리 소나무 숲은 603번 지방도로 바로 옆 서향 구릉지에 넓게 퍼져 있어 하늘로 뻗은 자태가 아름답다. 안면도에는 이러한 소나무 숲이 약 3500만㎡ 펼쳐져 있다.
강원도의 산악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우량한 소나무들이 여기서 자라고 있는 이유는 조선왕조가시행한 ‘송목금벌’이라 불리는 강력한 산림보호시책이다.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1488∼1544) 초기에 조정에서 직접 관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왕실에선 안면도의 소나무를 궁궐을 짓는 재목으로, 왕족이 죽으면 사용할 관곽재로, 조선재로 이용했다.
소원면에 있는 ‘만리포’는 은빛 모래밭, 울창한 송림, 낭만이 있고 추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고운 모래는 질이 양호하고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은 맡기고 즐기는 파도타기,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바나나보트, 만리포 바다 위를 시원하게 날아가는 짚라인, 갯바위에서의 짜릿한 손맛 바다낚시 등은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해변 좌우로는 해변데크, 출렁다리가 있다. 농구장, 풋살장, 족구장 등의 다양한 체육시설도 갖추고 있다. 풋살은 실내에서 행해지는 5인제 미니 축구다.
태안신두리해안사구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구 지대다. 태안군 신두리 해수욕장에 있다. 사막처럼 펼쳐진 넓은 모래벌판으로 이뤄져 있다. 빙하기 이후 약 1만5000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한 바람에 모래가 해안가로 운반되면서 오랜 세월을 거쳐 모래언덕이 만들어 졌다.
태안신두리해안사구에는 해안 사구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생태계가 조성돼 전국 최대의 해당화 군락지가 있다. 통보리사초, 모래지치, 갯완두, 갯매꽃, 갯방풍과 같은 희귀식물들이 분포해 있다. 표범장지뱀, 종다리, 맹꽁이, 소똥구리, 아무르산개구리, 금개구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근흥면에 있는 가의도 안에는 동백나무와 떡갈나무 등 원시 천연림이 있다. 해변을 따라 펼쳐진 기암절벽의 풍경은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남면에 있는 몽산포 해변은 동양 최대의 백사장을 자랑한다. 해변 뒤로 조성된 소나무숲은 인기영화, 드라마에 배경으로 많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