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일제 총독부 병원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1일 이후 수많은 만세시위 부상자들이 병원으로 옮겨져 왔다. 피를 흘리고 신음하는 수많은 조선인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몹시 분노를 터뜨리는 한 간호사가 있었다. 3월 6일 그녀는 근무를 마치고 동료간호사들을 옥상으로 불러모아 말했다. "우리는 저렇게 죄없이 다친 사람들을 치료만 하고 있을 겁니까? 우리도 만세를 불러야지요." 이후 병원 내에 간우회(看友會)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유인물을 만들었고 나흘 뒤인 10일 만세시위를 벌인다. 곧 의사들도 합세했다. 총독부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의 태업이 시작됐다. 이것이 '간우회 사건'이다. 주동자로 24세인 그녀가 체포되어 수감된다.
그러나 극심한 생활고를 겪던 부부는, 2년 뒤인 1922년 떨어져서 각자 도생하기로 한다. 박자혜는 뱃속에 아기를 가진 몸으로 등에 장남을 업고 서울로 돌아온다. 친척집과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돌아다닐 때 의열단원 나석주가 찾아온다. 1926년 겨울이었다. 그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할 계획을 털어놓았다. 박자혜는 황해도 출신이라 서울지리가 어두웠던 나석주에게 건물의 위치와 움직일 동선을 설명해줬다. 던진 폭탄은 불발했으나, 나석주는 일본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을 한다.
아는 사람 집을 전전하던 끝에 1927년 그녀는 인사동 69번지에 '산파 박자혜'란 조산원을 차린다. 식민지의 가난 속에서 애를 낳으러 오는 이도 없어서 파리를 날렸다. 교동보통학교 2학년인 아들 수범과 함께 종로 네거리에서 참외를 팔며 연명했다. 남편 신채호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외국위채위조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조선옷에 솜을 많이 넣어 두툼하게 만들어 하나 보내주시오." 방세가 벌써 석달이나 밀린 아내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찾아온 동아일보 기자에게 "대련이야 오죽 춥겠습니까"라고 말하며 흑흑 운다. 이 소식을 들은 신채호는 다시 편지를 써서 "힘겨우면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시오"라고 했다. 답답한 편지였지만 그것이라도 더없이 반가웠다.
1936년 관동형무소(뤼순감옥)발 전보 한통. "신채호 뇌일혈로 생명위독". 이튿날 박자혜가 부랴부랴 감옥으로 갔을 때, 남편은 의식불명 상태였다. 2월 21일 신채호는 숨을 거둔다. 사흘 뒤 박자혜는 유해를 열차에 싣고 귀국한다. 신채호의 죽음 이후, 박자혜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1942년 차남이 영양실조와 폐병으로 숨진 것으로 보아, 그 가난을 짐작할 수 있다. 남편이 돌아간 뒤 8년 뒤인 1944년 10월 16일 박자혜는 해방을 한해 앞두고 단칸 셋방에서 죽음을 맞는다. 유해는 화장한 뒤 한강에 뿌려졌다. 1990년 그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008년 청주 신채호의 묘소에 박자혜의 위패가 놓였다. "당신이 남겨놓고 가신 비참한 잔뼈 몇 개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나이다"며 신채호의 유골함을 든 채 오열하던 아내. 기구한 시대에 정상적인 나라를 꿈꾸던 남녀 사이에 오간 그 애틋하고 미안한 마음은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가뭇없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