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 안동에선 창작오페라 '김락'이 무대에 오른다. 2016년 초연된지 3년 만이다. 3·1운동 100주년, 아무리 시간이 그날의 기억을 지워왔다 하더라도 '김락' 두 글자는 영원히 후세의 가슴에 새겨둬야 하리라. 안동 독립운동가 문중의 맏며느리이자, 3·1만세 운동으로 참혹하게 삶을 마감한 여성투사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가 만든 일제 고등경찰 요사(要史)에는 이런 글이 있다.
'이중업의 처'가 김락(金洛, 1862~1929)이다. 친정아버지 김진린은 조선시대 도사(都事)를 지냈기에 그녀가 태어난 집을 도사댁이라 불렀다. 도사댁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이라 삼천석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인덕과 학문과 재력을 갖춘 명문가였다는 얘기다. 그녀의 형부(김우락의 남편)는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이다.
그녀가 시집간 곳도 그 강기(剛氣)가 만만치 않았다. 시아버지 이만도는 을사조약 이후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단식 24일 만에 순국한 분이다. 48세의 며느리는 집안의 이 상황을 온몸으로 겪었다. 남편 이중업은 1919년 파리 독립청원 활동을 펼쳤다. 아들 이동흠은 1917년 광복회에 들어가 군자금 모금활동을 했고 이듬해 이 일이 드러나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김락은 1919년 3월 17일과 22일 안동 예안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일제가 기록한 보고서가 말하고 있듯, 경찰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눈이 실명하는 가혹행위 끝에도 그녀는 안동 종부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아들 이동흠은 앞을 보지 못하는 몸으로 돌아온 어머니를 보면서 분노와 복수의 염(念)을 활활 태웠을 것이다. 실명 이후 10년의 시간 동안, 김락은 두 차례나 자결을 시도했다. 나라 잃은 캄캄한 하늘 아래 구차하게 사느니 깨끗한 죽음이 차라리 낫다는, 이만도의 길을 따라가려 했던 것이다.
온 가족이 저마다 치열한 독립투쟁에 나서 나라를 구하려 했던 김락 가문의 기풍. 57세 여성이 나이와 성(性)과 집안의 질곡을 떨치고 나서 스스로 선택한 사투. 망국 속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안동 종부의 가열찬 삶을, 어찌 이날에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0년 시간도 그 '뜻'을 식히지는 못한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