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평양. 14세 소녀 하나가 만세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유치원 선생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나라의 독립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한다. 1927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1930년 상해로 망명한다. 그러나 이 여성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2015년 중국인이 쓴 '이화림 회고록'이 충남연구원 박경철 박사에 의해 번역 출간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상해서 백범 김구의 비서를 지냈던 그녀는, 이봉창-윤봉길 의거에 적극 가담한 주모자였다.
상해에 온 뒤 이화림은 김두봉과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1931년 백범 김구의 비밀조직 한인애국단에 멤버로 가입한다. 이때 이름을 이동해로 바꾼다. 이 단체는 친일파 밀정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단체에서 그녀는 사격과 무술도 익혔다. 하지만 워낙 가난한 조직살림인지라, 스스로 나물장사도 하고 삯빨래, 수놓기도 했다. 백범 김구의 비서역할을 한 것은 이때였다. 1932년 뜻밖의 기회가 왔다.
1월 백범 김구는 31세 이봉창을 만난다. 그는 상해 일본인 철공장에서 월급 80원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일본인 가게에서 일을 했기에 일본어가 능통했다. 일본에 건너가 살 때도 있었는데 일본인의 양자로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란 일본이름으로 불렸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일왕 암살 지령을 내린다. 김구는 중국군 고급장교 김홍일과 교섭해 수류탄을 확보했다. 문제는 이 수류탄을 어떻게 지니고 일본으로 건너갈 것이냐였다. 이봉창이 문득 아이디어를 낸 것은, 바짓가랑이 속에 주머니를 만들어 넣고 꿰매는 방법이었다. 이 자리에, 이화림이 있었다. 화림은 밤새 이봉창의 팬티 안쪽에 수류탄주머니를 만들었다. 이봉창이 의거 이후 처형당했을 때, 가장 슬피 운 사람은 이화림이었다.
거사 이후 이화림은 "추풍낙엽처럼 일본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거 이후 그녀는 김구의 독립운동 노선에 회의를 지녔다고 한다. 개인 희생에 의존한 테러로는 독립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김구는 사회주의에 대한 알레르기가 심했다. 그녀는 이후 김구와 결별했다. '백범일지'에 한번도 이화림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은 것은 이때의 마음이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이후 중국에서 사회주의자의 길을 열정적으로 걸었다. 쑨원이 설립한 광저우 중산대학에 입학했고 법학을 공부하다 이후 의학으로 바꿨다. 1936년엔 민혁당에 가입했고 조선의용대에서 무장선전활동을 맡았다. 의열단 출신 리집중(본명 이종희)과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다. 해방을 맞았을 때 그녀는 의대에서 공부 중이었다. 1946년 대학을 마친 이화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하얼빈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한국전쟁 때는 조선인민군 위생소장으로 복무하다가 부상을 입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1960년대 중국 문혁 때 반혁명분자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1999년 전재산 5만원을 조선족학교에 전액기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함께했던, 의기(義氣)의 여성독립투사 이화림. 그녀는 아직도 이념의 냉골을 넘지못하고 역사의 저편에서 회고록의 책장 속에 갇혀 쓸쓸한 '100주년 3·1절'을 맞고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