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현장]묘지라도 함께 하고팠던 도산 안창호와 제자 유상규, 뜻밖의 이별 사건

2019-02-20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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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망우리 독립투사묘 '10대 취재단'②]망우공원 묘지에 묻힌 독립투사 10인을 청소년들이 만나보니

 

[유상규의 연보비.]


<1편에서 계속>

# 뛰어난 의사였던 유상규, 환자 치료하다 감염되어 타계
이 팀장 = 각자 취재해온 내용들, 잘 들었어요. 저기, 유상규 선생 묘소 안내판이 보이네요. 한번 올라가 볼까요? 유 선생에 대한 조사는 김호이 기자가 맡았죠?
김호이 = 예. 여러분들 유상규란 이름은 좀 낯설죠? 이 분은 도산 안창호의 제자예요. 우선 공원에서 세워놓은 저 연보비(年譜碑)를 한번 볼까요. 제가 읽어볼게요.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 도산을 위해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그는 귀국해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로 외과에 있는 동안 사퇴 후의 모든 시간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 이 글을 누가 썼나 하면 춘원 이광수가 썼어요.
장예령 = 춘원 이광수의 글이 왜 여기에 씌어 있나요?
김호이 = 이 글은 춘원의 ‘도산 안창호’ 전기(傳記)에 나오는 글입니다. 공원관리소에서 유상규의 글을 찾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춘원 글을 올렸다고하네요. 유상규는 뛰어난 의사였습니다. 현재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 출신이죠. 유상규는 저보다 세 살 많은 22세에 대학생으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죠.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에 보면, 상규가 이미륵을 설득하며 거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미륵과 친했던 유상규입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활동하다 도산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이자 의학자로 활약을 합니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세균에 감염되어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푸르메 = 어? 이 비석은 뭐죠?(유상규 묘소의 오른쪽 위에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지석인데...도산은 강남 압구정의 도산공원에 묘지가 있지 않나요?
김호이 = 아, 맞아요. 도산은 유상규가 타계한 뒤 2년 뒤인 1938년에 운명을 하죠. 그때 유언을 남겼는데, 사랑하는 제자 상규 곁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유언을 받들어 도산은 이곳에 묻혔죠. 그런데 유언에 대해 알지 못했던 당국에서 1973년 도산공원을 단장하고 그의 묘소를 이장합니다. 도산의 뜻과는 달리,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 거죠. 2007년 유상규 선생을 국립묘지로 이장할 수 있다는 허가가 났지만, 후손은 도산의 비석이 서 있는 이곳을 떠나게 할 수 없다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예요.
윤난아 = 갑자기 눈물이 핑~
 

[도산 안창호선생 비.]



# 후배 최신복 "죽어도 방정환 곁에"··· 선산 묏자리 놔두고 이곳에

이 팀장 = 자, 이번엔 방정환 묘소로...
강지현 = 예, 소파 선생은 제가 담당이에요. 그는 일제강점기에 어린이 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으로 잘 알려져 있죠. 그가 돌아가실 때의 유언은 한편의 동화 같았습니다.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이끄는 검정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았죠. 1931년의 일이었습니다. 쑥돌로 만들어진 상석이 아주 단아하고 아름답습니다. 소파 선생은 원래 홍제동 화장터 납골당에 있었는데 1936년 그를 존경했던 후배들이 모금운동을 벌여 망우리에 묘를 조성했지요. 저기 ‘무동의이린어’라고 되어 있는 비석 보이죠? 저게 무슨 뜻이죠? 비석의 글씨는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습니다. 1936년 글을 쓰던 방식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어린이의 동무! 仙如心童은 거꾸로 읽으면 ‘동심여선’으로 어린이의 마음은 천사와 같다는 뜻입니다.
 

[10대 탐사취재팀이 소파 방정환 비 뒤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준수 = 오세창 선생은 소파 선생과 관련이 있는 분인가요?
강지현 = 방정환은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의 딸 손용화의 남편입니다. 그러니까 셋째사위였죠. 오세창은 손병희 선생의 참모 역할을 했던 분이고요. 그래서 비석에 글씨를 써준 것입니다. 아참, 그리고 아까, 망우리 소파 묘소를 조성한 후배 중에 개벽사라는 출판사에 함께 근무했던 최신복이라는 기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소파 사후에, ‘어린이’잡지에 방정환의 강연을 들은 일제경찰이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방정환을 ‘선생’으로 모셨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죠. 방정환의 망우리 묘소 이전도 그가 먼저 나섰습니다. 최신복은 죽어서도 방정환 선배 옆에 있고 싶다고 유언해, 자기 선산을 놔두고 바로 저 아래 묻혀있습니다. 저기 ‘충주 최신복지묘’라고 씌어진 비석 보이시죠?
윤난아 =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는 동요운동을 펼쳤죠. ‘오빠생각’은 11세의 최순애가 이 잡지에 기고한 것이고, ‘고향의 봄’은 15세 이원수 소년이 응모해 뽑힌 것이라 하더군요. 까치까치 설날은, 하는 윤극영의 ‘설날’도 이 잡지를 통해 나왔죠. 정말 소파는 식민지시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한 ‘이 땅의 산타’였던 것 같아요.
 

[위창 오세창묘의 사진을 찍으니, 무지개같은 상서로운 빛이 내려왔다.]



# 일본에게서 대한 국새 돌려받은 민족대표

이 팀장 = 이번엔 오세창 선생의 표지판이 보이네요. 장예령 기자와 윤난아 기자가 담당했죠? 아시겠지만, 오세창은 한용운과 함께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망우공원의 양대인물 중의 한분이죠. 자, 이 시점에서 100년 전 3·1운동 당시 우리가 취재하는 인물들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한번 파악해봅시다. 오세창은 55세, 한용운은 40세, 문일평이 31세였습니다. 나머지 일곱명은 10대이거나 20대였습니다. 여러분과 비슷한 ‘청년’이었죠. 오기만은 14세, 방정환은 20세였습니다. 그리고 유상규, 오재영, 서광조는 22세였고, 김병진은 24세, 서동일은 26세였습니다. 여러분이 100년 전에 3·1만세운동을 만났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오늘은 취재하며 그걸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장 기자가 오세창에 관해 설명을 해주시죠.

장예령 = 오세창은 구한말 역관(외교관)이었던 아버지 오경석의 DNA를 물려받아 20세에 역관이 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의 기자였죠.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해방 후엔 건국준비위원을 맡았고, 1946년 민족대표로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 국새를 돌려받기도 했죠.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때 장의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민족의 원로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역작은 이 땅의 역대 글씨와 그림을 정리한 ‘근역서화징’이란 책입니다. 1928년에 낸 이 책은 서화 수집가였던 그가 실물을 바탕으로 방대한 자료를 엮어놓은 귀한 서적입니다.
윤난아 = 서울의 간송미술관 문화재들을 수집한 전형필은, 바로 오세창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죠. 추사 김정희의 유명한 그림 ‘세한도’에는 오세창의 찬사문이 적혀 있습니다. 일본이 가져갔던 이 귀한 그림을 찾아온 손재형이 세한도 옆에 글을 써주기를 부탁했던 거죠. 저기 ‘위창 오세창묘’라고 한자로 씌어진 비석 보이죠? 저 글씨가 손재형 선생이 손수 써준 전서체라는 예술적 글씨입니다.
 

[호암 문일평의 연보비.]



# 북한에 있는 외손자, 문일평 '일제에 의한 독살설' 주장

이 팀장 = 이번엔 문일평 묘소로 가봅시다. 문 선생은 김해온 기자와 이푸르메 기자가 맡았죠?
이푸르메 = 예.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문일평은 32세였죠. 3월 12일 그는 서울 보신각으로 달려가 낭독시위를 주도합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끌려가 8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분은 7년 전에 이미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같은 분들과 비밀결사 동제사(同濟社)를 만들어 활동하죠. 삼일운동 이후 1927년 국내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신간회의 발기인이 됐죠. 소설가 벽초 홍명희는 이런 말을 했죠. “내 나이 또래에 조선사를 논하고 쓸 만한 사람이 둘 있는데 하나는 신채호이고 하나는 문일평이다.” 식민지 시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각종 언론에 기고한 글이 150편이나 된, 열혈 언론인이었죠. 이분의 깨알 같은 비문은, 조선일보의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이규태 기자가 썼습니다.
김해온 = 문일평 선생의 셋째딸 문소용은 ‘한국의 명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산을 교육사업에 다 내놓으시고 가난하게 되어 자식들 공부시키기가 어렵게 됐을 때도, 부친은 매일신보 간부로 취임해달라는 총독부의 권유를 끝내 뿌리치셨지요.” 문 선생은 1939년에 타계를 했는데, 북한에 있는 외손자가 일제에 의한 독살설을 내놓기도 했었죠. ‘민족21’이란 잡지에서 제기한 것인데, 일제가 가택수색을 하면서 면도날에 독약을 발라놨다는 겁니다. 일제가 이런 방식으로 독립지사를 독살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긴 합니다. 문일평 선생의 장남 문동표와 부인 김은재씨는 6·25 때 월북을 했고, 부인은 한때 평북 여성동맹위원장을 지냈다고 하네요.

# 3.1운동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고문 당한 14살 오기만

(오기만 묘소 150m란 표지가 보였다. 그런데 총독부 초대 산림과장인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의 묘소 부근에서 길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올라가니 오기만 묘소 5m란 팻말이 있었는데, 귀신에 홀린 것처럼 묘소를 찾을 수 없다. 그의 묘는 가족납골묘 형태로 되어 있었다. 비석에는 ‘오세형가대대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에 ‘기만’이란 글자가 보인다. 이런 경우 방문자를 위해, 좀 더 친절하게 안내표지를 해놨으면 좋았을 것을.)
이은성 = 오기만은 1919년 3월 30일 황해도 배천읍 장날에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부친 오세형과 함께 체포되었죠. 그때 나이가 겨우 14살이었죠. 내가 지금 18살인데,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나이에 3·1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을 받았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이후에 배재고보 2학년을 마친 뒤 중국을 왕래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했다고 합니다. 1928년에는 신간회 지부 설립을 알리는 격문을 뿌리다가 붙잡혀 투옥됐죠. 출옥한 뒤 상해로 망명했고 중국공산당 산하에 청년동맹을 결성해 사회주의 운동을 펼칩니다. 1931년 이후 국내로 들어와 공산당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징역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됩니다, 2년 뒤에 중병으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감옥을 나왔으나 곧 죽음을 맞고 맙니다.
이재건 = 오기만의 동생 오기영 또한 독립운동을 벌인 사람인데, ‘사슬이 풀린 뒤’라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이 책은 3·1 운동 때부터 해방까지 독립지사 가족의 고난을 기록한 수기입니다. 한때 학교의 임시교재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이분은 해방 뒤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정치문화평론을 언론에 발표하여 유명해졌죠. 1949년에 이승만 정권에 회의를 느껴 월북했다고 합니다.
 

[만해 한용운의 묘와 묘비.]



# 스님 만해의 묘 옆에 있는 부인

이 팀장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만해 한용운의 묘입니다.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없나요?
김호이 = 아, 스님인데 부인 묘가 있네요?
이팀장 = 맞아요. 여기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적혀있죠? 그러니까 부인 유씨가 오른쪽에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이 아니라, 망자 한용운의 위치에서 오른쪽이겠죠.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이란 책에서 "육체를 타고나서 식욕이나 색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일 뿐이다. 관세음보살이 미인으로 몸을 나타내 음탕한 사나이를 제도했다는 고사대로 수행자에게 결혼을 허해야 한다"고 주장한 분입니다. 그래서 소신대로 대처승이 됐죠. 이분의 식견이 놀라운 것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에 절실하게 받아들여지는 인구국력론을 주장합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것이겠죠. 만해는, 우리나라가 제대로 행세를 하려면 인구가 1억쯤은 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김호이 = 3·1운동 때의 만해 모습은 어땠나요?
이 팀장 = 독립선언서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충돌하기도 했죠. 만해는 내용이 좀더 과감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결국 행동강령인 공약3장을 만해가 썼지요. 그는 3·1운동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됩니다. 법정에서 왜 말이 없느냐고 재판장이 묻자 "조선인이 조선민족을 위해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인가"라고 말합니다. 나중에 최남선이 친일로 변절한 뒤 그를 찾아가자 "최남선은 이미 내가 장례를 치렀다, 당신은 누구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제 총독부 있는 방향으로 집을 내기 싫다면서 굳이 북향을 고집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이 팀장 = 자, 이제 동쪽 길 옆에 모셔진 분들은 대강 살핀 것 같네요. 이제 길을 돌아서 서울 쪽에 모셔진 분들을 찾아보도록 하죠. (추위 속에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걷고 나서야 우리는 서동일과 오재영의 팻말을 발견했다. 거의 묘원 한바퀴를 다 돌아가는 지점에 있었다. 팻말은 발견했지만 서동일의 묘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묘번 107266을 찾아보니 최옥경이란 이름의 묘지가 나온다. 알고보니 이분은 서동일의 부인이었다. 오재영 묘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중섭 묘를 바라보는 길에서 왼쪽 20여m를 가니 오준영이란 이름이 나온다. 준영은 오재영의 다른 이름이었다.) 서동일에 대한 얘기부터 해볼까요?

# 서동일은 친일 앞잡이 처단하는 다물단 활동

강지현 = 서동일 선생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기 어려웠습니다. 경북 경산 출신으로 30세 때인 1923년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해 국민당에 가입을 합니다. 이곳에서 재정부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귀국해 대구로 잠입합니다. 이곳에서 1300여원을 만들어 북경에 전달하는 등 군자금 모집책이었죠. 이분의 연보비에는 다물(多勿)에 대한 설명이 보이네요. 그는 1925년에 다물단에 가입합니다. 입을 닫고 행동을 보여준다는 다물의 지침을 실천하며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혐의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홍준영 = 그 옆에 있는 묘소는 오재영의 묘입니다. 오재영은 23살 때인 1920년 9월에 김원봉이 단장으로 있는 의열단의 거사를 도와줍니다. 의열단원들은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려 했으나 부산경찰서에서 냄새를 맡고 이들을 역공하죠. 단원 17명이 검거됐습니다. 김원봉은 부산경찰서장을 죽이라고 단원 박재혁에게 지령을 내립니다. 박재혁은 상해에서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입항해 오재영의 집에 하루 묵었죠. 이튿날 등에 고서를 지고 책 판매상으로 위장한 뒤 부산경찰서장에게 접근합니다. 그는 서장에게 책을 꺼내는 척 하며 폭탄을 투척했죠. 경찰서장은 중상을 입었고 박재혁 또한 다친 채 체포됩니다. 박재혁은 옥중에서 단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박재혁이 던진 폭탄은, 오재영이 집에다 숨겨 보관한 것이 밝혀졌고 그 또한 의열단 테러에 공동혐의로 체포되죠. 이듬해인 1921년에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죠.

# 김병진은 안동시장서 만세운동, 서광조는 조선국민회 활약

이 팀장 = 김병진 선생과 서광조 선생의 묘소는 비록 찾지 못했으나, 우리가 자료 추적을 통해 알게된 내용을 공유하도록 합시다.

김호이 = 김병진 선생은 3·1운동 때 경북 안동시장에서 24살의 청년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했습니다. 그곳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합니다. 이후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고 있죠. 망우공원에는 3명의 김병진 묘가 있는데, 어느 것이 그의 묘인지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네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광조 선생은 목포사람으로 1917년 3월23일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만들어 전라도 지역 책임자로 활동했습니다. 이듬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8개월형을 받아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연보비에는 그가 가입했던 조선국민회의 결성취지가 적혀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한국인으로서 자치의 자유를 향유할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금일에 동지의 결속을 도모하여 그 준비를 해야한다”라고 새겨져 있네요.
 

[탐사팀은 하루종일 망우산을 누볐다. 잘 읽지도 못하는 한자로 된 묘비를 답답하게 기웃거렸고, 표지판이 가리키는 길로 찾아갔지만 묘지가 오리무중이라 당황한 적도 있었다. ]



# 10대 기자들, 망우리 탐사 취재 10인10언

 

[이상국팀장(논설실장)]


이 팀장 = 하루 종일 답사를 하며 기록을 확인하고 탐사취재를 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오늘 답사를 통해 느낀 점을 한 마디씩만 해주신다면?



 

[홍준영 학생기자]


홍준영 - 망우리 공원묘지에 독립투사가 이렇게 많이 잠들어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김준수 학생기자]


김준수 - 공원 전체가 깔끔하게 정비된 느낌은 있지만, 안내판은 여전히 문제가 많았습니다. 특히 독립지사 묘지의 경우 답사객이 많은데, 좀 더 친절하게 제대로 갈 수 있게 세심한 표지가 절실합니다.


 

[이은성 학생기자]


이은성 - 예, 맞아요. 특히 비문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누구 묘인지조차 한글세대는 알기 어렵습니다. 100년 전 애국지사들의 뜻을 지금 세대가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할 일 아닌가요.


 

[이푸르메 학생기자]


이푸르메 - 100년 전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한 또래가 목숨을 걸고 나섰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나는 과연 같은 상황이 왔을 때 그럴 수 있을까 내내 돌이켜보는 하루였습니다.



 

[윤난아 학생기자]


윤난아 - 나는 취재팀 중 가장 어린 편(17세)인데,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들기 위해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고, 공동묘지에 묻혀 쓸쓸히 있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김해온 학생기자]

김해온 -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나라’라는 것이 그냥 생겨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 그래서 묘지를 답사하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재건 학생기자]


이재건 - 유상규 선생과 도산 안창호의 사연은 정말 잊지 못할 겁니다.




 

[장예령 학생기자]


장예령 - 아직도 망우리 공원이 좀 칙칙한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도 정말 프랑스의 추모공원처럼,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명상하는 힐링숲으로 거듭나면 좋을 것 같아요.


 

[강지현 학생기자]


강지현 - 100년 전 이 나라가 그토록 고통을 받다가 이제 날개를 폈는데, 다시 100년 뒤엔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어요. 좀 길게 나라와 인간을 보게된 계기가 됐어요.



 

[김호이 학생기자]


김호이 - 10대가 보는 3·1운동과 독립투쟁. 그것은 이 나라가 우리 모두의 것이며 소중히 지켜가야 한다는 큰 교훈이었어요. 묘비의 주인공들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망우공원 독립투사 유적 10대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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