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눈]1919년 1월21일 오늘, 고종황제 독살사건 총정리

2019-01-2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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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의 고종황제 초상.]

 

대한제국 고종 황제 100주기 제향 (남양주=연합뉴스) 임병식 기자 = 21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에서 열린 대한제국 고종 황제 100주기 제향에서 왕세손(왼쪽)과 제관이 향을 올린 뒤 예를 표하고 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고종 승하 100주년이기도 하다. 당시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독살설'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3·1운동 기폭제가 됐다. 2019.1.21 andphotodo@yna.co.kr/2019-01-21 13:09:56/ <저작권자 ⓒ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오늘은 고종황제가 서거한지 딱 100년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이 그날인 것을 아는 이도 많지 않지만, '사망 원인'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도 드뭅니다. 사망 원인이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 국가의 근간이 형성되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이 사건에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고종황제 독살은 지금까지도 설(說, 소문이나 주장의 의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고종황제에 대한 이해 또한 일제가 이미지로 만들어놓은 암군(暗君, 둔하고 어리석은 군주)이란 평가를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는 게 현실인 측면이 있습니다. 과연 고종황제는 왜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으며,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요.


# 윤치호 일기에 나타난, 고종독살의 현장

1919년 1월21일 아침 고종이 승하한 직후, 전국에 독살설을 적은 벽보가 나붙었습니다. 일각에선 자살설도 나돌았다고 합니다. 학계에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다루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고종독살은 아직도 '3.1운동을 촉발한 소문'의 성격으로 은연 중에 규정되어 왔습니다.

독살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는 윤치호 일기가 손꼽힙니다. 윤치호는 고종의 시신을 직접 봤던 민영달(명성황후의 사촌동생)의 말을 기록해놓았습니다. 민영달은 멀쩡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켰으며, 시신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 있었고 혀는 닳아서 없어졌으며 30cm 쯤 되는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있었다고 합니다.

또 고종 승하 직후에 궁녀 2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독이 든 식혜를 먹인 살인이었음을 정황상 입증하고 있습니다. '자살'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식혜를 대령했을 궁녀의 죽음을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 구라토미 일기에 들어있는 고종독살 사건

비교적 최근에 나온 독살 증거는,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76)가 2009년 역사학보에 실은 논문에 등장합니다. 이교수는 일본 국회헌정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 1853~1948) 일기를 공개했죠. 구라토미는 1919년 당시 일본궁내성의 황실 회계심사국 장관이었습니다. 일기에서 구라토미는 송병준을 만났다는 얘기를 한 뒤, 황실 업무를 다루는 센고쿠 마사유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데라우치(전 총리)가 하세가와 조선총독을 시켜 이태왕(李太王, 고종)에게 뜻을 전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고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과 민병석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 데라우치가 얘기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들은 게 없는가?"

이태진 교수는 이 질문을 근거로, 송병준이 구라토미에게 그 소문을 전달했을 가능성을 거론합니다. 구라토미는 이후 다른 황실 관리인 이시하라 겐조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또다른 황실 관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는데, 이번엔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고종)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민병석 윤덕영 송병준이 태왕으로 하여금 서명 날인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주 독립이 되면 이들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풍설이 있다."

# 파리강화회의 문서 때문에 독살

이 말을 종합하면, 구라토미는 송병준에게서 파리강화회의 문서에 고종이 서명하는 일을 알아차린 데라우치가 조선총독을 시켜 반대의 뜻을 전달했지만 고종이 말을 듣지 않자 그 일을 감추기 위해서 문서날인을 반대한 송병준 무리로 하여금 독살을 하도록 했다는 유추가 가능합니다.

즉 독살의 원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고종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제의 책동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며, 독살의 실행자들은 송병준을 비롯해 민병석과 윤덕영이었던 것이 드러납니다.

이 기록은 당시 일제 황실의 주요 관료의 일기인지라 신빙성이 높을 뿐 아니라, 오고간 대화들 속에 전 총리와 조선총독이 포함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로선 극비사항이었을 것입니다.

송병준이 이런 말을 일제 황실관료에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민병석과 윤덕영이 작위를 잃게 되는 상황과 관련해, 송은 이런 얘기를 꺼냈죠. 즉, 일제를 위해 황제를 독살까지 한 사람인데 처우를 섭섭하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콤플레인이었습니다. 구라토미가 이런 치명적인 기록을 남겨놓은 까닭은 뭘까요? 그는 데라우치 전 총리의 노선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고종 황제의 독살과 관련한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이교수는 주장합니다.

# 데라우치-하세가와-송병준-궁녀 '독살라인'

그러나 구라토미의 기록 또한 송병준에게 들었던 내용일 뿐이니, 여전히 사실과 동일시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데라우치 - 하세가와 - 송병준 민병석 윤덕영 - 궁녀2명 - 고종의 사후 증상 등의 핵심 연결고리는 거의 드러나 있고, 증언들이 말하는 정황 또한 대개 일치하지만, 당사자나 목격자의 사실 증언이 없기에 독살 범행자들을 '확증'하지 못하는 역사적 미궁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이태진 교수는 이런 허전함을 의식해서인지 구라토미는 독살이라고 판단했을 거라는 말을 보탭니다.

영친왕비 이방자는 시아버지 고종의 죽음에 대해 "처음에는 뇌일혈로 알았지만 나중에 독살인 걸 알게 됐다"는 말을 수기에 적어놓고 있습니다. 1922년 이방자는 아이를 데리고 순종에게 인사하러 창덕궁을 방문하는데, 이때 궁내성 직함으로 수행한 사람이 구라토미라는 것입니다. 구라토미는 이때 이방자에게 시아버지가 독살되었음을 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이완용의 독살 개입설

같은 독살설이라도 이완용을 지목하는 쪽도 있습니다. 그날밤 당직 사령은 이완용과 이기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정황상 추정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송병준 일파가 그 기회를 활용했을 수도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이완용 또한 적극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완용 독살설은 암살을 자행한 세력의 큰 줄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 독립운동가 선우훈이 기록한 '사외비사(史外秘史)'는 고종의 해외망명 기도와 암살이 관련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이런 의지를 파악한 이완용이 선수를 쳐서 암살을 꾀했다는 겁니다

일제는 고종 서거 일주일 뒤인 1월27일 "이태왕의 서거에 따라 사흘간 가무음곡을 중지한다"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일제가 만든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이 1월20일 병세가 깊어져 1월21일 묘시에 승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병인지는 물론 밝히지 않았습니다.

1919년 3월15일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는 3.1운동을 겪고난 뒤 뒤늦게 고종 임종과 관련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고종은 그날밤 식혜를 마셨으나, 혼자 마신 것이 아니라 여러 나인과 함께 마셨으며, 그후 안락의자에 앉아 잠을 자다가 새벽 1시15분쯤 갑자기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뇌일혈이 와서 숨을 거뒀다는 것입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오버랩 되는 해명입니다.

# 조선 백성들은 황제독살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당시 발행된 조선독립광주신문은 고종이 한일합방을 거부해 독살당했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중 천도교 출신 대표였던 이종일은 1919년 1월22일에 쓴 '묵암비망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제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당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대한인의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일대 요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서거 하루 뒤에 바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운영하는 천도구국단의 정보망을 가동했을 것입니다. 천도교 수장 손병희도 국민대회 소집을 포고하는 격고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고종황제의 서거 원인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평소 건강하시옵고 또 병환의 소식이 없었는데 평일 밤 궁전에서 갑자기 서거하시니 이 어찌 상식적인 이치이겠습니까. 황제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에게 부탁해 밤에 황제가 드시는 식혜에 독약을 섞어 잡수시게 드리니 이를 드신 황제의 옥체가 갑자기 물과 같이 연하게 되고 뇌가 함께 파열하셨으며 구규(아홉구멍)에 피가 용솟음치더니 곧 세상을 떠나셨소이다. 곧 두 명의 궁녀도 위협하여 나머지 독약을 먹여 처참히 죽게 하고 입을 틀어막았으니..."

당시에도 이렇듯 분명하게 고종의 독살 상황을 묘사하며 문제 삼았는데,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고종황제가 누구에 의해서 왜 서거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상태로 그 폭발하는 시간을 초점 없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 고종은 왜 암살 당했나

고종은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강제로 퇴위된 상태였습니다. 1914년 중국에 대한광복군정부가 생깁니다. 첫 망명정부였죠. 헤이그밀사로 활약했던 이상설(1871~1917)이 설립한 정부였으며, 고종은 이 정부의 상징적 수장이었습니다. 이 정부에서 활동하던 이회영(1867~1932)의 주도 아래 고종을 중국에 망명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죠. 고종이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일제에게 실제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식민지의 저항을 키우고 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19년부터 시작된 파리강화회의는 전후 신질서를 모색하는 중요한 국제회의였습니다. 특히 국제문제의 기본 원칙에 미국 윌슨대통령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와 집단안전보장 원칙이 채택됩니다. 고종은 이 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더 이상 식민지를 원하지 않으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립을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그 의사를 표명한 문서에 고종이 서명을 한 것입니다. 당시 일제가 가장 불편해하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입니다. 일단 조선 내의 최대 위험인물이며 독립운동의 잠재적 중추인 고종을 제거해야할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일제 수뇌부가 식민지 내부 여론의 저항을 무릅쓰고 잔혹한 결행을 한 까닭은 거기에 있습니다.

# 고종의 죽음은 무엇을 불러 일으켰나

고종 독살에 대한 반발은 일제의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명성황후 때의 저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 나라 전체가 들썩거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원래 황제의 장례일(인산일)인 3월3일 봉기를 하려고 했으나 국장(國葬) 당일에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또 일제의 허를 찌르려 날짜를 앞당겼습니다. 마침 3월2일은 일요일인지라, 하루 더 당겨 1일날 거사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대규모 시위를 기획한 것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아이디어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고종은 황위에서 퇴위되고 난 다음에도 끊임없이 나름의 독립운동을 지속해온 '정신적 리더'였습니다. 많은 친일파들에 둘러싸여 제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가운데서도, 나라를 되찾을 모든 방안을 강구해가며 국제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려 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황제의 죽음이 아니라, '독립운동 헤드쿼터'의 소멸이었습니다.

# 황제의 죽음 앞에서 민족과 민주주의를 발견하다

3.1운동에서 표현한 '만세'는 원래 황제 앞에서만 표현할 수 있는 축원이었습니다. 당시 '대한'은 대한제국이었고, 대한독립만세는 대한제국이 독립하는 것을 만년 동안 기리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이란 개념이 국민들의 마음 속에 없었습니다. 나라의 리더인 황제를 잃은 날, 황제가 미처 해내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라가 홀로 서는 것이었죠. 황제가 없는 나라의 몸부림. 그것이 자생적 민주주의의 탯줄이 되는 역설의 순간이었습니다.

그해 삼월의 기억은 놀라운 각성을 불러 일으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한 나라 한 겨레임을 피와 고통 속에서 확인하는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같은 존재'일 수 있구나를 확인한 것입니다. 황제가 없는 나라이지만 우린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은,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새로운 국가부활 패러다임을 만들어냅니다.

# 우리가 고종황제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

황제가 주축이 되어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서 생겨난 겨레 의식의 대전환. 그것이 3.1운동이 숨기고 있는 어마어마한 의식혁명이었습니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민주주의가 발견한 가치였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황제 독살 속에서 태어나 갈수록 강성해지던 괴물같은 제국의 갖은 핍박을 견디며 성장해왔죠. 임시정부는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의 씨앗을 뿌리고 키운 기적의 둥지였죠.

우리가 고종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지난 왕조의 황제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숨쉬듯 누리고 있는 가치가 언제 어디서 생겨났는가를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페이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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