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은 김정은과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만남이 “북·미 정상회담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사안을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 김정은이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을 찾는 게 ‘관행’처럼 됨으로써 중국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앞으로 김정은보다 그 뒤편에 큰형님처럼 버티고 설 시 주석의 생각이 더 중요해졌다. 비핵화 게임의 참여자(player)가 늘어날수록 중재자(촉진자)로서의 역할 공간은 줄어든다.
북한인들 트럼프 정부의 이런 속내를 모를 리 없다. 트럼프가 만나자면 만나주고, 남한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경제지원이나 받으면 된다. 북한이 그동안 가장 성공한 핵전략은 뭘까. 관련국들로 하여금 ‘북이 언젠가는 핵을 포기할 거란 희망을 계속 갖도록 해온 것’이라고 한다. 재치 있는 지적이다. 이번에도 북은 모두를 그런 ‘희망’ 속에 묶어두고 뒤로는 추가 핵개발(핵탄두의 소형화)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핵(核)에 관한 한 더 강경하다는 미국의 우파 정권 아래서 김정은이 G2와 어깨를 함께하는 지도자로 부상한 것은 아이러니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적대적 공생관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트럼프가 입만 열면 “김정은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중재자론’이 계속 통할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중재는커녕 북·미 간 유착을 더 걱정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기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우선 ‘북한의 비핵화’라는 개념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정책도 전략도 출발점은 ‘말’이다.
전문가들이 누차 지적했지만 북이 말하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우산을 걷어내라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비핵화와 다르다. 작년 12월 조선중앙통신은 조선반도 비핵화에 대해 “북과 남의 영역 안에서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겨냥하고 있는 주변으로부터의 모든 핵 위협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미국의 핵 전략자산을 반입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오직 자신들만이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핵 지배권을 갖겠다는 것이다. 어떤 명분으로? 북의 핵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자주를 지키는 보검(寶劍)이기 때문이다. 그들로선 ‘한반도 비핵화’가 ‘북의 핵 무력 완성’과 같은 말인 이유다.
1974년 7·4 남북공동성명이 교훈이 될 듯싶다. 당시 남북이 통일의 3대 원칙으로 합의한 게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었다. 김일성은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민족 대단결’이 통일의 원칙에 포함되면 남한에선 공산주의를 합법화해야 한다. 논리적으론 그렇다. 그런데도 이에 동의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 ‘민족 대단결’은 1988년 그 위험성을 인식한 노태우 정권이 북한과 협의 없이 ‘민주’로 바꿨다. 북은 지금도 ‘민족 대단결’을 고수하고 있다.
조명균 통일부장관은 9일 국회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조선반도의 비핵화와 우리가 목표로 하는 북한의 비핵화와는 차이가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늦었지만 바른 인식이다.
‘중재자론’에 대한 과도한 기대도 접어야 한다. 집착하니까 무리수가 나온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조건 없는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 의향을 밝힌 데 대해 우리 정부가 대북 제재를 우회하는 방안을 찾아보겠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게 좋은 예다. 김정은으로서는 중재에 응했으니 그 대가를 지불하라는 거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는가. 자칫하면 중재자가 북·미 양쪽으로부터 불신 받는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다.
남북관계 진전도 중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의 비핵화도 이끌어낸다는 ‘남북관계 개선-비핵화 선순환’ 시도도 의미가 있다. 그렇더라도 보다 냉철한 현실인식 위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상대는 하나같이 프로다. 이벤트 위주의 아마추어 식 접근으로는 한계가 있다.